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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화스물여덟 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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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화

스물여덟 글자

세종 ④ · 훈민정음 · 144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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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리와 함께 보면 더 생생해요.
장면마다 바람·모닥불·강물 소리가 바뀌고, 이야기 흐름을 따라 음악도 달라져요.
지난 이야기

조선의 넷째 임금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충녕대군)이었으나, 책을 사랑하고 생각이 깊어 1418년 스물두 살에 왕위에 올랐다. 집현전에 젊은 학자들을 모아 책을 펴내고, 『농사직설』로 조선 땅에 맞는 농사법을 정리했으며, 노비 출신 장영실과 함께 비를 재는 측우기, 해그림자로 때를 알리는 앙부일구, 스스로 종을 치는 물시계 자격루를 만들었다. 그러나 마흔을 넘기면서 왕은 눈병과 갖은 병에 시달렸다. 그리고 왕의 마음에는 오래 걸린 일이 하나 있었다.

등장인물

세종조선의 넷째 임금
1443년, 마흔일곱 살
소헌왕후세종의 왕비 · 심씨
여덟 아들과 두 딸의 어머니
최만리집현전 부제학
새 글자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다
정인지집현전 학자
『훈민정음』의 뒷글을 썼다
원이 엄마1586년, 경상도 안동
남편을 잃은 젊은 아내

1998년 4월, 경상도 안동. 새 마을을 짓기 위해 옛 무덤들을 옮기던 날이었다.

한 무덤의 관 뚜껑을 열자, 누운 사람의 가슴 위에 접힌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사백 년 넘게 어둠 속에 있던 편지. 글씨는 한자가 아니었다.

조사하던 사람…한글이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했다 — ‘원이 아버지에게.’

그 글자는, 그보다 143년 전의 어느 겨울밤에 태어났다.

한 임금이 등불 아래서
자기 입 모양을 들여다보던 밤.

1443년 겨울, 경복궁. 모두가 잠든 깊은 밤에도 임금의 방에는 늦도록 불이 켜져 있었다.

세종조선의 넷째 임금 · 마흔일곱 살
세종ㄱ… 그…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구나.

왕은 구리 거울에 입을 비추며, 소리를 낼 때마다 혀와 입술이 어디에 닿는지 살폈다.

소헌왕후세종의 왕비
소헌왕후또 눈이 붉어지셨사옵니다.
밤마다 무엇을 그리
쓰시옵니까?
세종백성의 말을…
들리는 그대로
적을 글자요.

그 무렵 조선 사람들은 우리말로 말하고, 글은 중국의 한자로 썼다.

한자를 익히려면 여러 해 동안 공부만 해야 했다. 농사짓고 고기 잡는 백성들에게 글은 먼 나라의 것이었다.

글을 모르면,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 사정을 적어 올릴 수가 없었다.

1432년, 왕은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세종 (1432년)하물며 어리석은 백성이야,
어찌 죄의 크고 작음을 알아
스스로 고치겠는가.

관청 앞에 법을 써 붙여도, 그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왕은 소리를 내는 몸을 들여다보았다.

첫소리 글자는 소리를 낼 때의 입과 혀의 모양을 본떴다.

ㄱ —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

ㄴ — 혀끝이 윗잇몸에 닿는 모양

ㅁ — 입의 모양

ㅅ — 이의 모양

ㅇ — 목구멍의 모양

소리가 세지면 획을 하나씩 더했다.

가운뎃소리는 하늘(·)과 땅(ㅡ)과 사람(ㅣ).

셋을 어울러 열한 글자를 지었다.

모두 스물여덟 글자.

1443년 12월. 『세종실록』은 이렇게 적었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스물여덟 자를 지었다.
글자는 간단하지만 바꾸어 쓰기가 끝이 없으니,
이를 ‘훈민정음’이라 하였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 훈민정음.

1444년 2월 20일,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를 비롯한 학자 일곱이 새 글자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다.

최만리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우리나라는 대대로 큰 나라를 섬겨 왔사온데,
따로 글자를 만드는 것은 몽골·여진·일본처럼
오랑캐나 하는 일이옵니다!
최만리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재주일 뿐,
학문에 방해가 되고
정치에 도움이 되지 않사옵니다.
더구나 병을 다스리러 초수리에 가시는
길에서까지 언문에 마음을 쓰시니,
옥체가 상하실까 두렵사옵니다.
세종설총의 이두도 백성을
편하게 하려던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운서를 아느냐?
사성칠음에 자모가
몇이나 있느냐?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않으면,
누가 바로잡겠느냐!

왕은 최만리 등을 의금부에 가두었다가, 이튿날 모두 풀어 주었다.

그날 왕은 이런 말도 남겼다.

나는 늙어서 날을 보내기 어려워,
책을 벗 삼을 뿐이다.

새것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왕은 이미 오래 아팠고,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444년 2월 28일, 임금과 왕비는 함께 청주 초수리로 길을 떠났다. 왕의 눈병을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흉년이 들어, 왕은 행차를 되도록 작게 꾸리게 했다.

이튿날, 한 노인이 임금의 수레 앞에 엎드렸다.

노인전하, 억울하옵니다!
소인은 글을 몰라
하소연할 글 한 장
쓸 수가 없사옵니다…
세종수레를 멈추어라.
그 사연을 들어 주어라.

『세종실록』은 왕이 노인의 사연을 가려 주게 하고, 무명 한 필을 내렸다고 적었다.

초수리의 샘물은 후추처럼 톡 쏜다 하여 ‘초수(椒水)’라 불렸다.

왕은 그해 봄과 가을, 두 번에 걸쳐 백 일이 넘게 이곳에 머물렀다.

소헌왕후이것이 정말 글자이옵니까?
아이들 장난 같사옵니다.
세종슬기로운 이는 아침나절에,
더딘 이도 열흘이면
깨칠 것이오.
…그럼 중전이
한번 써 보시겠소?

왕비는 붓을 들었다. 처음 써 보는 글자였다.

누늘 앗기쇼셔.

소헌왕후— 눈을 아끼소서.

왕은 오래도록 그 종이를 내려놓지 못했다.

그해 겨울,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이 스무 살로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정월에는 일곱째 아들 평원대군이 열아홉 살로 그 뒤를 따랐다.

두 아들을 잇달아 잃은 왕비는 그 뒤로 시름시름 앓았다.

1446년 3월 24일, 왕비는 둘째 아들 수양대군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쉰두 살이었다.

소헌왕후눈을 아끼소서.

왕은 서른여덟 해를 함께한 사람을 잃었다.

百姓爲字便安百姓爲字便安訓民正音

1446년 9월 상순.

『훈민정음』이 완성되었다.

세종이 쓴 머리글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않는다.

세종이 쓴 머리글그래서 어리석은 백성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끝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이가 많다.

세종이 쓴 머리글내가 이를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세종이 쓴 머리글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마다 쓰기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훈민정음 —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집현전 학자 정인지는 책 끝에 이렇게 적었다.

정인지집현전 학자
정인지의 뒷글슬기로운 이는 아침나절이 다 가기 전에,
어리석은 이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
바람 소리, 학의 울음,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까지
모두 적을 수 있다.

1447년. 왕은 둘째 아들 수양대군에게, 왕비의 명복을 비는 책을 새 글자로 짓게 했다 — 『석보상절』.

그리고 그 책을 읽고, 왕 스스로 노래를 지었다.

하나의 달이, 천 개의 강에 비친다.

임금이 지은 노래의 이름은 『월인천강지곡』 — 달이 천 개의 강에 비치는 노래.

부처의 가르침이 달빛처럼 온 세상에 고루 비친다는 뜻이었다.

새 글자로 쓴 가장 이른 노래 가운데 하나였다.

궁궐의 연못에도, 한강에도, 이름 모를 마을 앞 개울에도 —

달빛은 고르게 내려앉았다.

왕은 그로부터 세 해 뒤, 1450년 2월에 세상을 떠났다. 쉰네 살이었다.

왕은 왕비와 한 무덤에 나란히 묻혔다.

그로부터 136년 뒤.

1586년, 안동에 살던 이응태가 서른한 살로 세상을 떠났다. 어린 아들 원이와, 아이를 밴 아내가 남았다.

원이 엄마이응태의 아내

남편을 묻기 전, 아내는 남편에게 편지를 썼다 — 임금이 만든 그 글자로.

원이 아버지에게.

원이 엄마의 편지당신은 늘 나에게 말했지요. 둘이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원이 엄마의 편지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시나요.

원이 엄마의 편지나와 어린 원이는 누구를 의지해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가시나요.

원이 엄마의 편지뱃속의 아이가 태어나면, 누구를 아버지라 부르라 하시렵니까.

원이 엄마의 편지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 주세요. 꼭 듣고 싶어요.

원이 엄마의 편지하고 싶은 말은 끝이 없는데, 종이가 모자라 이만 적습니다.

편지 곁에는 미투리 한 켤레가 있었다. 삼 껍질에 아내의 머리카락을 섞어 삼은 신이었다.

병이 낫기를 빌며 삼았지만, 남편은 끝내 그 신을 신어 보지 못했다.

1998년 4월 24일. 412년 만에 무덤에 빛이 들었고, 편지는 그날까지 남편의 가슴 위에 있었다.

임금은 「어린 백성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끝내 제 뜻을 펴지 못한다」며 스물여덟 글자를 지었다.

그 글자는 사백 년이 넘도록,
한 사람이 끝내 하고 싶었던 말을 지켜 주었다.

지금 당신이 읽고 있는 이 글자도, 그 겨울밤에 태어났다.

제86화 끝

역사 노트

이야기 속 장면은 이런 기록과 유적을 바탕으로 그렸어요.

  1. 『월인석보』 첫머리의 훈민정음 언해본 첫 장『월인석보』(1568년 다시 펴낸 책) 첫머리의 훈민정음 언해본 — ‘나랏말ᄊᆞ미…’

    1443년 12월, 언문 스물여덟 자

    『세종실록』 1443년(세종 25년) 12월 기사는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다’며, 글자가 첫소리·가운뎃소리·끝소리로 나뉘었다가 합쳐져 한 글자를 이루고, 간단하지만 바꾸어 쓰기가 끝이 없어 ‘훈민정음’이라 했다고 적었어요. 글자를 만든 것(창제)은 1443년, 글자의 원리와 쓰는 법을 풀이한 책 『훈민정음』을 완성해 널리 알린 것(반포)은 1446년 9월이에요. 한글날 10월 9일은 이 책의 정인지 서문에 적힌 ‘9월 상순’을 양력으로 바꾼 날이에요.

    『세종실록』 세종 25년 12월 · 28년 9월
  2. 최만리의 상소와 왕의 대답

    1444년 2월 20일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직제학 신석조, 직전 김문, 응교 정창손, 부교리 하위지, 부수찬 송처검, 저작랑 조근이 반대하는 글을 올렸어요. 큰 나라를 섬기는 도리에 어긋나고, 이두로도 충분하며, 학문에 방해가 되고, 초수리로 병을 다스리러 가는 길에서까지 서두를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어요. 왕은 ‘설총의 이두도 백성을 편하게 하려던 것이 아니냐’, ‘내가 운서를 바로잡지 않으면 누가 바로잡겠느냐’며 꾸짖고 일곱을 의금부에 가두었다가 이튿날 풀어 주었어요. 말을 바꾼 김문은 따로 벌을 받았고, ‘삼강행실을 언문으로 옮겨도 사람의 됨됨이는 바뀌지 않는다’고 한 정창손은 벼슬에서 물러났어요.

    『세종실록』 세종 26년 2월 20일·21일
  3. 초수리로 간 임금과 왕비

    『세종실록』은 1444년 2월 28일 ‘임금과 왕비가 청주 초수리에 거둥하다’라고 적었고, 이튿날에는 수레 앞에서 원통함을 아뢴 노인의 사연을 가려 주고 무명 한 필을 내렸다고 했어요. 흉년이라 행차는 되도록 작게 꾸렸고, 초수리에 머무는 동안 마을 사람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리기도 했어요. 왕은 그해 봄과 가을 두 차례 모두 백여 일을 머물렀다고 해요. 초수리(지금의 청주 초정리)의 샘물은 탄산이 들어 톡 쏘는 맛이 나고, 지금은 그 자리에 초정행궁이 다시 지어져 있어요. 노인이 한 말은 기록에 없어 상상으로 지었어요.

    『세종실록』 세종 26년 2월 28일·29일, 3월
  4. 훈민정음 해례본(영인본)의 첫소리 글자 풀이『훈민정음』 해례본(영인본)의 첫소리 글자 풀이

    입 모양과 하늘·땅·사람

    『훈민정음』 해례본은 첫소리 글자의 기본 다섯 자를 소리 내는 몸의 모양에서 따왔다고 풀이해요.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 ㄴ은 혀가 윗잇몸에 붙는 모양, ㅁ은 입, ㅅ은 이, ㅇ은 목구멍의 모양이에요. 소리가 세질수록 획을 더해 ㅋ·ㄷ·ㅌ·ㅂ·ㅍ·ㅈ·ㅊ·ㆆ·ㅎ을 만들었고, 가운뎃소리는 하늘(·)·땅(ㅡ)·사람(ㅣ)을 본떠 어울러 썼어요. 처음 스물여덟 자 가운데 ·(아래아)·ㆁ(옛이응)·ㆆ(여린히읗)·ㅿ(반치음) 넷은 지금은 쓰지 않아요. 해례본은 1940년 무렵 안동에서 나타나 간송 전형필이 지켜 냈고,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되었어요.

    『훈민정음』 해례본 제자해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 월인천강지곡 첫 장『월인천강지곡』 첫 장

    소헌왕후와 『월인천강지곡』

    소헌왕후 심씨(1395~1446)는 1408년 충녕대군과 혼인했어요. 세종이 왕이 된 뒤 아버지 심온이 태종에게 죽임을 당하고 집안이 무너졌지만, 왕비의 자리는 지켜졌어요. 여덟 아들과 두 딸을 두었고, 1444년 12월 광평대군, 1445년 1월 평원대군을 잇달아 잃은 뒤 1446년 3월 24일 수양대군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어요. 세종은 수양대군에게 왕비의 명복을 비는 『석보상절』을 짓게 했고, 이를 읽고 스스로 부처의 공덕을 기리는 노래 『월인천강지곡』을 지었어요(1447년). 둘 다 새 글자로 쓴 가장 이른 책 가운데 하나예요. 『월인천강지곡』은 큰 글씨의 한글 옆에 한자를 작게 달아, 한글을 먼저 읽게 짰어요.

    『세종실록』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6. 여주 영릉(세종·소헌왕후 합장릉) 항공 사진여주 영릉(세종·소헌왕후 합장릉)

    영릉, 한 무덤의 두 사람

    세종은 1450년 세상을 떠나 먼저 간 소헌왕후와 한 무덤에 묻혔어요. 처음에는 지금의 서울 서초구 대모산 아래 헌릉 서쪽에 모셨다가, 1469년(예종 1년) 지금의 경기도 여주로 옮겼어요. 왕과 왕비를 봉분 하나에 함께 모신 합장릉이에요. 2009년 조선 왕릉 40기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었어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국가유산청
  7. 원이 엄마가 남편 이응태에게 쓴 한글 편지 (1586)원이 엄마가 남편 이응태에게 쓴 한글 편지 (1586년)

    원이 엄마의 편지

    1998년 4월 24일, 안동 정상동에서 택지를 만들려고 무덤을 옮기던 안동대학교 박물관 조사단이 고성 이씨 이응태(31세에 세상을 떠남)의 무덤을 열었어요. 가슴 위에 ‘원이 아바님ᄭᅴ’로 시작하는 한글 편지가 있었는데, 1586년(병술년) 6월 초하루에 아내가 쓴 것이었어요. 종이가 모자라자 가장자리를 돌려 가며 빼곡히 써 내려갔어요. 곁에서 나온 미투리(삼신)는 삼 껍질에 머리카락을 섞어 삼은 것으로, 싼 종이에 남은 글로 보아 아내가 남편의 병이 낫기를 빌며 삼은 것으로 여겨져요. 이 화에 실은 편지는 원문의 뜻을 지금 말로 짧게 옮긴 것이에요.

    안동대학교 박물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8. 상상으로 그린 것

    왕이 구리 거울로 입 모양을 살피는 모습, 왕과 왕비가 등불 아래서 나눈 말, 초수리 행궁에서 왕비가 새 글자로 처음 쓴 ‘누늘 앗기쇼셔(눈을 아끼소서)’는 기록에 없는 이야기예요. 기록은 왕과 왕비가 함께 초수리에 갔다는 것, 왕의 눈병이 깊었다는 것, 왕이 왕비를 잃은 뒤 새 글자로 그의 명복을 비는 책과 노래를 지었다는 것까지 전해요. 정의공주가 글자를 다듬는 일을 도왔다는 이야기도 집안 족보에 전하지만, 이 화에서는 다루지 않았어요.

    『세종실록』 · 『죽산안씨대동보』

이번 화의 열쇠말

다음 화 예고 · 준비 중

제87화 · 압록강에서 두만강까지

북쪽 국경에서는 여진의 말발굽이 끊이지 않았다. 최윤덕과 김종서가 압록강과 두만강을 따라 4군과 6진을 세우고 — 오늘 우리가 아는 국경선이 그어진다.

사진 출처

이 웹툰의 삽화는 모두 새로 그린 것이며, 등장인물의 이름과 대사는 역사적 사실과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상상해 재구성한 것입니다. 연대와 해석은 학계의 일반적인 설명을 따랐고, 의견이 갈리는 부분은 역사 노트에 밝혀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