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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화하늘을 재는 사람
KO
제85화

하늘을 재는 사람

세종 ③ · 장영실 · 1423~14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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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

세종은 집현전에 젊은 학자들을 모아 밤새 책을 읽게 했다. 늙은 농부들에게 물어 『농사직설』을 펴냈고, 새 세금 법을 정하기 전에 온 나라 백성 17만여 명에게 뜻을 물었다. 관청 여종에게는 아이를 낳기 전후로 쉬게 하고, 1434년에는 그 남편에게도 서른 날을 쉬게 했다. 그 무렵, 임금 곁에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한 사내가 있었다.

등장인물

장영실동래현 관청의 노비 출신
임금 곁에서 하늘을 쟀다
세종조선의 넷째 임금
1433년 서른일곱 살
소헌왕후세종의 왕비
허조이조 판서
장영실의 벼슬에 반대했다
조말생병조 판서
장영실의 벼슬에 찬성했다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어디에 묻혔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가 하늘을 재던 몇 해만이,
실록에 남아 있다.

그는 경상도 동래현 관청에 딸린 노비였다. 아버지는 원나라 소주·항주 사람, 어머니는 기생이었다.

관청 아전이게 다시
돈다고?

손재주가 남달라, 고장 난 것은 무엇이든 고쳐 냈다.

그 솜씨가 한양까지 알려져, 그는 태종 때부터 궁궐에 불려 와 물건을 만들고 고쳤다.

새 임금은 그를 아꼈다.

1423년 무렵, 임금은 그에게 벼슬을 주려 했다. 신하들의 뜻이 갈렸다.

허조이조 판서
허조관청 기생의 아들을
어찌 상의원에
앉히겠사옵니까.
조말생병조 판서
조말생이런 사람이야말로
상의원에 더욱
맞사옵니다.

임금은 대신들에게 다시 물은 끝에, 그를 궁궐의 물건을 만드는 상의원의 별좌로 삼았다. 노비가 벼슬을 받은 것이다.

그 무렵 조선은 하늘의 시각을 중국에 기대고 있었다.

중국의 달력과 시각은 중국 하늘에 맞춘 것이었다. 한양의 해는 베이징의 해보다 일찍 떴고, 일식이 일어나는 시각도 어긋났다.

임금은 조선의 하늘을,
조선의 눈금으로 재고 싶었다.

1432년, 경복궁 경회루 북쪽에 돌을 쌓아 높은 대를 짓기 시작했다 — 간의대.

대 위에는 별의 자리를 재는 기구 ‘간의’를 올렸다.

하늘의 둥근 길을 구리 고리로 본뜬 혼천의가 돌았다.

밤마다 관리들이 대에 올라 별을 쟀다. 그 가운데 노비로 태어난 사람이 있었다.

조선의 하늘이, 처음으로 조선의 눈금으로 재어지기 시작했다.

1433년 가을, 그는 물의 힘으로 스스로 시각을 알리는 물시계를 만들어 냈다 — 자격루.

未
세종내가 가르쳐 만든 것이라 하나,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결코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만대에 전할 물건을 만들었으니,
그 공이 작지 않다.

임금은 그에게 정사품 벼슬 ‘호군’을 더해 주었다.

閣漏報卯

1434년 7월 1일.

경복궁 보루각에서, 새 물시계가 처음으로 시각을 알렸다.

물이 항아리에서 항아리로 흘러내리면, 물 위에 뜬 잣대가 조금씩 떠올랐다.

잣대가 정해진 눈금에 닿으면, 구리 구슬이 굴러 떨어지고 —

구슬이 나무 인형의 팔을 건드려, 종과 북과 징을 울렸다.

사람이 지키지 않아도, 물시계가 스스로 시각을 알렸다.

그 소리를 받아 종루의 큰 종이 울리면, 한양의 성문이 열리고 닫혔다.

온 도성이, 한 사람이 맞춘 시각에 맞추어 하루를 살았다.

그해 10월, 해시계 앙부일구가 혜정교와 종묘 앞 길가에 놓였다. 하늘을 우러르는 가마솥 모양의 해시계였다.

아이엄마, 그림자가
말한테 왔어!
엄마점심때구나.
아버지 진지
갖다 드리러 가자.

글을 모르는 백성도 볼 수 있도록, 시각마다 글자 대신 열두 동물신을 그려 넣었다.

해시계에는 이런 글이 새겨졌다. ‘이제부터 백성이 일할 때를 알리라.’

글을 모르는 백성을 위한 시계.

그로부터 아홉 해 뒤, 임금은
글을 모르는 백성을 위한 글자를 만든다.

1438년, 장영실이 임금의 편전 곁에 흠경각을 지었다. 그 안의 ‘옥루’에서는 해가 뜨고 지는 산 아래로, 사계절 농사짓는 사람들의 인형이 움직였다.

세종늘 곁에 두고,
백성이 농사짓는 어려움을
잊지 않으려는 것이오.
소헌왕후…전하다우십니다.

1441년, 세자(훗날의 문종)가 비가 올 때마다 구리 그릇에 빗물을 받아 그 깊이를 재기 시작했다.

이듬해 임금은 같은 크기의 측우기를 만들어 서울과 여러 고을에 두고, 비가 내린 양을 적어 올리게 했다.

1442년 봄. 임금의 몸은 여러 해 앓아 온 병으로 지쳐 있었다. 눈은 가까이 있는 사람도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어두워졌다.

그해 장영실은 임금이 탈 가마 ‘안여’를 만드는 일을 맡았다.

1442년 3월, 그가 감독해 만든 임금의 가마가 부러지고 무너졌다.

의금부는 그를 가두고 물었다. 임금이 타실 가마를 튼튼히 만들지 못한 죄였다.

곤장 백 대를 아뢰자, 임금은 두 등급을 낮추어 주었다. 그리고 그는 벼슬에서 쫓겨났다.

그해 어느 밤, 간의대 위의 혼천의는 멈추어 있었다.

소헌왕후그 사람을
많이 아끼셨지요.
세종하늘의 시각은 다 재어 주고 갔는데…
나는 그 사람의 시간을
지켜 주지 못했소.

그 뒤로, 실록에는 장영실이라는 이름이 다시 나오지 않는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어디에 묻혔는지 아무도 모른다.

임금이 왜 그를 다시 부르지 않았는지도, 기록은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떠난 뒤에도, 물시계는 날마다 스스로 종을 쳤다.

해시계의 그림자는 날마다 열두 동물 위를 지나갔다.

그는 하늘의 시간을 재었지만, 자기의 시간은 어디에도 적어 두지 않았다.

지금 고궁에는 뒷날 다시 만든 앙부일구와 자격루가 남아 있다.

해가 나면, 그림자는 오늘도 열두 동물 가운데 하나를 가리킨다.

그 그림자가 가리키는 시각이,
그가 남긴 이름이다.

제85화 끝

역사 노트

이야기 속 장면은 이런 기록과 유적을 바탕으로 그렸어요.

  1. 장영실

    장영실은 태어나고 죽은 해가 전하지 않아요. 『세종실록』 1433년 9월 16일 기사에서 세종은 ‘영실은 아비가 원나라 소주·항주 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인데, 솜씨가 남보다 뛰어나 태종께서도 보호하셨고 나도 아낀다’고 했어요. 그를 상의원 별좌로 삼으려 할 때(1422~1423년 무렵) 이조판서 허조는 ‘기생의 소생을 상의원에 쓸 수 없다’며 반대하고 병조판서 조말생은 ‘이런 사람이 더욱 알맞다’며 찬성해, 다른 대신들에게 다시 물은 끝에 별좌로 삼았어요. 자격루를 두고는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만들지 못했을 것’이라 했고, 황희와 맹사성이 평양 관노 출신이 호군이 된 옛일을 들어 찬성하자 그에게 호군 벼슬을 더해 주었어요. 실록은 그가 본래 동래현의 관노였다고 적었어요.

    『세종실록』 15년 9월 16일, 16년 7월 1일
  2. 덕수궁 광명문에 전시되던 보루각 자격루 (2011년)덕수궁 광명문에 있던 보루각 자격루(1536년, 국보)

    자격루 — 스스로 치는 물시계

    1433년 장영실이 완성한 자격루는 1434년 7월 1일부터 경복궁 보루각에서 쓰였어요. 물이 일정하게 흘러들어 떠오르는 잣대가 구슬을 굴리고, 구슬이 인형을 움직여 종·북·징을 쳐서 시각을 알렸어요. 이 소리를 받아 도성의 종루에서 종을 쳐 성문을 열고 닫았어요. 지금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는 자격루는 1536년(중종 31년)에 다시 만든 것의 일부예요.

    『세종실록』 15년 9월, 16년 7월 1일 · 국립고궁박물관
  3. 경복궁에 놓인 앙부일구 복제품경복궁에 놓인 앙부일구 복제품

    앙부일구 — 글 모르는 백성의 해시계

    1434년 10월 2일 해시계 앙부일구를 혜정교와 종묘 앞에 처음 두었어요. 솥을 하늘로 향해 놓은 듯한 모양이라 ‘앙부(仰釜)’라 했어요. 실록은 ‘시각을 맡은 신(동물)의 몸을 그린 것은 어리석은 백성을 위해서이고, 길가에 둔 것은 보는 사람이 모이기 때문’이라 적었고, 김돈은 ‘이제부터 백성이 일할 때를 알리라’는 글을 지었어요. 지금 전하는 앙부일구는 17~18세기에 만든 것들이에요.

    『세종실록』 16년 10월 2일 · 국립고궁박물관
  4. 국보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1837년)공주 충청감영 측우기(1837년, 국보)

    측우기는 누가 만들었나

    흔히 장영실이 측우기를 만들었다고 알려졌지만, 『세종실록』은 1441년 세자(문종)가 가뭄을 걱정해 비가 올 때마다 그릇에 고인 빗물을 재 보았다고 적었어요. 그해 8월 측우기를 서울과 각 도에 두기로 했고, 1442년 5월 그 크기(길이 1자 5치, 지름 7치)와 재는 법을 정해 온 나라에 퍼뜨렸어요. 강수량을 같은 그릇으로 재서 기록한 것은 세계에서 가장 이른 일 가운데 하나예요.

    『세종실록』 23년 4월·8월, 24년 5월
  5. 1442년, 부서진 가마

    1442년 3월 16일, 대호군 장영실이 감독해 만든 임금의 가마(안여)가 부러지자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았어요. 4월 27일 의금부가 곤장 백 대에 해당한다고 아뢰자 세종이 두 등급을 낮추어 주었고, 5월 3일 직첩(벼슬 문서)을 거두고 곤장을 치게 했어요. 이 기록을 끝으로 장영실은 실록에서 사라져요. 왜 다시 쓰이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어요.

    『세종실록』 24년 3월·4월·5월
  6. 상상으로 그린 것

    동래의 소년 시절 장면, 아전과 아이와 엄마의 말, 흠경각과 간의대에서 임금과 왕비가 나눈 말은 상상으로 지었어요. 임금이 장영실을 아꼈고 자격루의 공을 크게 칭찬했다는 것은 실록에 있지만, 그를 내보낸 뒤 임금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는 기록에 없어요.

    『세종실록』

이번 화의 열쇠말

다음 화

제86화 · 스물여덟 글자

1443년 겨울, 임금은 밤마다 등불 아래서 자기 입 모양을 들여다보았다. 반대 상소와 짓무른 눈, 그리고 왕비 — 스물여덟 글자.

사진 출처

이 웹툰의 삽화는 모두 새로 그린 것이며, 등장인물의 이름과 대사는 역사적 사실과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상상해 재구성한 것입니다. 연대와 해석은 학계의 일반적인 설명을 따랐고, 의견이 갈리는 부분은 역사 노트에 밝혀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