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태왕
장면마다 바람·모닥불·강물 소리가 바뀌고, 이야기 흐름을 따라 음악도 달라져요.
400년, 광개토대왕은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왜군으로 가득 찼던 신라의 도읍을 구하고, 달아나는 왜를 임나가라의 종발성까지 쫓게 했다. 고구려에 볼모로 와 있던 신라의 실성은 401년 고향으로 돌아가 이듬해 왕이 되었고, 이번에는 내물왕의 아들들을 왜와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그리고 1946년, 경주의 한 신라 무덤에서 광개토대왕의 이름을 새긴 고구려의 청동 그릇이 나왔다.
등장인물
414년, 아버지의 비석을 세운다
409년 태자가 된다
서른아홉에 세상을 떠난다
요동성과 목저성을 친다
따라 고구려로 온다
남쪽에서 온 집의 딸
414년 가을, 고구려의 도읍 국내성 가까운 들판에 돌을 쪼는 소리가 울렸다.
새 왕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대왕을 위해 세운 비석에, 석공들이 글자를 새기고 있었다.
그날, 남쪽 먼 곳에서 온 가족들이 무덤 곁에 짐을 풀었다. 태왕의 무덤을 지킬 ‘수묘인’ 집안들이었다.
궁금하냐?
뭐라고 새겨요?
비석은 시조 추모왕의 이야기로 시작해, 태왕의 일생을 적었다.
이야기다.
비석은 태왕의 마지막을 이렇게 적었다.
하늘이 돌보지 않아,
서른아홉에 나라를 버리고 떠나셨다.
昊天不弔 卅有九 宴駕棄國 — 광개토대왕릉비
열네 해 전, 400년.
그해 고구려는 남쪽으로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했다.
그리고 서쪽에서는,
후연이 쳐들어왔다.
400년 2월, 후연의 왕 모용성은 ‘고구려 왕이 예를 갖추지 않는다’며 몸소 3만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쳐라!
후연은 신성과 남소 두 성을 빼앗고, 700여 리 땅을 차지했다.
고구려 사람 5천여 집이 후연 땅으로 끌려갔다.
우리 집은…?
백성 5천 집이 끌려갔습니다!
찾으면 된다.
어찌 찾겠느냐.
402년, 이번에는 고구려군이 요하를 건너 후연의 숙군성을 쳤다.
쳐라!
성을 지키던 후연의 평주자사 모용귀는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404년, 남쪽 대방 땅에 왜가 쳐들어오자 태왕이 몸소 나가 크게 무찔렀다고 비석은 적었다.
그해 11월, 고구려군은 다시 후연을 쳤다.
이듬해 정월, 이번에는 후연이
요동성으로 몰려왔다.
405년 정월, 후연의 왕 모용희가 요동성을 에워쌌다. 성은 곧 떨어질 듯했다.
마라!
평평하게 하라.
가마를 타고 들어갈 것이다!
『삼국사기』는 모용희가 이렇게 명령했다고 적었다.
그 사이, 성안에서는 단단히 채비를 갖추었다.
무너진 곳을 메워라!
후연군은 끝내 요동성을 빼앗지 못하고 돌아갔다.
지켰다!
졌대요!
아니다.
그 값은 군사들이 치른다.
406년 12월, 거란을 치러 간 모용희는 거란의 많은 군사에 겁이 나 돌아가려 했지만, 함께 온 황후가 듣지 않았다.
많다니…
고구려를 친다!
모용희는 가벼운 군사로 3천여 리를 달려 고구려로 향했다.
군사와 말은 지치고 얼어, 죽은 이가 길에 줄을 이었다.
목저성을 친 후연군은, 이번에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407년, 후연에서 정변이 일어나 모용희가 죽임을 당하고, 고운이 새 왕이 되었다. 이 나라를 흔히 북연이라 부른다.
『삼국사기』는 고운의 할아버지가 고구려의 한 갈래였다고 적었다.
408년 3월, 태왕은 북연에 사신을 보내
한 핏줄의 정을 나누었다.
409년 4월, 태왕은 맏아들 거련을 태자로 세웠다.
고구려의 태자다.
『삼국사기』는 거련이 체격이 크고, 뜻과 기개가 호방했다고 적었다.
열 해 남짓, 태왕의 군대는 서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으로 움직였다.
410년, 태왕은 몸소 군사를 이끌고 동부여로 향했다.
비석은 동부여가 추모왕의 옛 속민이었는데, 배반하고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고 적었다.
나라입니까?
우리 백성이던 나라다.
고구려군이 동부여의 도읍 여성에 이르자, 동부여는 온 나라가 놀라 엎드렸다.
엎드립니다…!
거두어라.
이겼다.
비석은 ‘태왕의 은혜가 널리 미쳤다’고 적었다. 태왕은 곧 군사를 돌렸다.
돌아가는 고구려군의 뒤를, 따라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따라오시오?
따르려 하오.
비석은 태왕을 사모해 관군을 따라온 이들로, 미구루 압로·비사마 압로 등 다섯 압로를 새겼다.
비석은 태왕이 평생 쳐서 깨뜨린 것을 이렇게 셈했다.
성 예순넷, 마을 1,400.
凡所攻破城六十四 村一千四百 — 광개토대왕릉비
태왕은 살아 있을 때 이렇게 일렀다고, 비석은 적었다.
멀고 가까운 옛 백성에게
무덤을 지키게 하셨다.
가난하고 약해질까 걱정이구나.
내가 죽은 뒤에는, 내가 몸소 싸워 데려온
한·예 사람들로 무덤을 지키게 하라.
但取吾躬巡所略來韓穢 令備洒掃 — 광개토대왕릉비
‘한·예’는 태왕이 싸워 얻은 남쪽 땅들에서 데려온 사람들이었다.
고구려의 태자다.
412년, 광개토대왕이 세상을 떠났다. 서른아홉 살이었다.
태자 거련이 왕위를 이었다.
뒷날 아흔여덟 해를 살아
‘장수왕’이라 불리게 되는 왕이다.
414년 9월 29일, 태왕을 산릉으로 옮겨 모셨다.
고구려 사람들은 장례 날 북을 치고 춤추며 음악을 울려, 죽은 이를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무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람 키의 세 배가 넘는 돌을 일으켜 세웠다.
하나, 둘, 셋!
태왕의 말대로, 데려온 한·예 사람 220집이 무덤을 지키게 되었다.
장수왕은 그들이 법도를 모를까 하여 옛 백성 110집을 더했다. 모두 330집이었다.
쓸어야 하오.
비석에는 무덤을 지킬 집들이 어느 고장에서 왔는지, 몇 집인지가 하나하나 새겨졌다.
‘아단성·잡진성 두 곳에서 열 집을 간연으로 삼는다’는 글이었다.
우리 고향 이름이에요!
못 갈 고향이지.
너희 고향의 이름도 남는다.
비석에는 수묘인을 사고팔지 못하게 하는 법도 새겼다. 판 사람은 벌하고, 산 사람은 무덤을 지키게 했다.
어찌 찾겠느냐.
414년 가을, 스무 살 남짓한 장수왕은 아버지의 비석 곁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그 뒤로 1,600년이 넘도록, 비석은 그 자리에 서 있다.
태왕이 한 일과,
무덤을 지킨 사람들의
고향 이름을 품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