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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화신라를 구하라
제21화

신라를 구하라

광개토대왕 ③ · 4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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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리와 함께 보면 더 생생해요.
장면마다 바람·모닥불·강물 소리가 바뀌고, 이야기 흐름을 따라 음악도 달라져요.
지난 이야기

396년,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제의 도성을 에워쌌고, 궁지에 몰린 백제의 아신왕은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아신왕은 이듬해 태자 전지를 왜에 볼모로 보내 왜와 손을 잡았다. 399년, 평양에 내려온 태왕 앞에 신라의 사신이 달려와 ‘왜인이 국경에 가득하다’며 도움을 청하자, 태왕은 사신에게 은밀한 계책을 일러 돌려보냈다.

등장인물

광개토대왕고구려의 왕 담덕.
신라에 군대를 보낸다
실성신라의 귀족.
고구려에 와 있는 볼모
내물왕신라의 왕.
비석은 ‘매금’이라 불렀다
신라 사신도움을 청하러
고구려에 온 사신
고구려 장수5만 군사를 이끈 장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미사흔내물왕의 아들.
아직 어리다
광개토대왕백제는 맹세를 깨고
왜와 손잡았다.
신라마저 왜에
내줄 수는 없다.

399년, 평양. 신라의 사신은 태왕이 일러 준 계책을 품고 남쪽으로 말을 달렸다.

그 무렵 고구려에는, 신라에서 온 볼모가 한 사람 있었다.

실성신라 귀족 대서지의 아들
실성왜가… 신라 땅에
가득하다니.

392년 정월.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오자, 내물왕은 고구려가 강성하다 하여 실성을 볼모로 보냈다.

내물왕고구려는 강하다.
그대가 가 주어야겠다.
실성…예.
어머니는…
무사하실까.

그 뒤로 일곱 해. 실성은 아직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사신은 서라벌로 돌아와, 태왕이 일러 준 계책을 왕에게 전했다.

내물왕신라의 왕
신라 사신태왕께서 이르시기를…
내물왕…그리
하리다.

그 계책이 무엇이었는지, 비석은 적지 않았다.

이듬해 400년. 광개토대왕릉비는 이렇게 적었다.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어
신라를 구하게 하였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 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5만 군사를 이끌고 가서,
신라를 구하라!
고구려 장수명을
받들겠습니다!

비석은 이번에는 태왕이 ‘몸소 이끌었다’고 하지 않고, 군대를 ‘보냈다’고 적었다.

보병과 기병 5만이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실성저 깃발들이…
신라로 간다.

비석에 따르면, 고구려군은 남거성에서 신라성으로 나아갔다. 신라성은 신라의 도읍이다.

고구려백제신라가야서해동해왜(바다 건너)한강낙동강평양성고구려의 큰 성한성백제의 도읍신라성신라의 도읍 (경주)임나가라김해로 보는 견해가 많다왜왜왜왜왜보병·기병 5만 (길은 짐작)남거성·종발성의 자리와 군대가 지난 길은기록에 없어 짐작할 뿐이다

신라의 도읍 신라성. 그 안에 왜가 가득했다.

내물왕고구려군은…
아직인가.
소년할아버지,
저 소리…!
할아버지말발굽
소리다…!
신라 군사붉은 깃발이다!
고구려군이 왔다!

고구려군이 신라성에 이르렀다.

고구려 장수왜적을 몰아내라!

관군이 막 이르자, 왜적이 물러갔다.

신라 사람들왜가 물러간다!
우리가 살았다!

비석은 고구려군을 ‘관군’, 왜를 ‘왜적’이라 불렀다.

고구려군은 왜의 뒤를 급히 쫓아,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렀다.

고구려 장수놓치지 마라!
끝까지 쫓아라!

종발성은 곧 항복해 따랐다.

임나가라는 지금의 김해에 있던 금관가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왜구는 크게 무너졌다.

고구려 장수왜가 바다로
달아난다!

그런데 비석의 이 대목은, 여기서부터 글자가 많이 닳아 없어졌다.

官官軍軍方方至至倭倭賊賊退退自自倭倭背背急急追追至至任任任那那那加加加羅羅羅從從從拔拔拔城城城城城城卽卽卽歸歸歸服服服安安安羅羅羅人人人戍戍戍兵兵兵新新羅羅城城城城倭倭寇寇大大潰潰寐寐錦錦

남은 글자 ‘安羅人戍兵(안라인수병)’도 ‘안라의 수비병’, ‘신라 사람을 두어 지키게 했다’처럼 읽는 법이 갈린다.

지워진 글자들 사이로, 신라 왕을 ‘매금(寐錦)’이라 부른 문장이 남아 있다.

예전에는 신라 매금이 몸소 와서
아뢴 적이 없었는데…

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 — 광개토대왕릉비

이어지는 글자도 군데군데 지워졌지만, 광개토대왕 때에 이르러 신라 매금이 고구려에 조공했다는 뜻으로 읽힌다.

왜가 물러간 신라성.

내물왕고구려가
신라를 살렸소.
태왕께 고마움을
아뢰어야겠소.
고구려 장수태왕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해 8월, 동쪽 하늘에 꼬리별이 나타났다.

내물왕너도… 무언가
아는 게로구나.

겨울 10월에는 왕이 늘 타던 말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었다고 한다.

401년 7월, 실성은 아홉 해 만에 신라로 돌아가게 되었다.

광개토대왕아홉 해 동안
고구려를 보았으니,
돌아가 신라를
잘 지키라.
실성태왕의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실성은 남쪽으로, 고향으로 말을 몰았다.

실성은 아홉 해 만에 서라벌로 돌아왔다.

실성서라벌…
그대로구나.
내물왕먼 길에
고생 많았소.
내물왕그대가 가 주어야겠다.
실성……

『삼국사기』는 실성이 자기를 볼모로 보낸 내물왕을 원망했다고 적었다.

402년 2월, 내물왕이 세상을 떠났다.

왕의 아들들이 아직 어려, 나라 사람들은 실성을 왕으로 세웠다.

실성왕신라의 새 왕
볼모로 떠났던 내가,
이제 신라의 왕이다.
미사흔내물왕의 아들 · 아직 어리다
실성왕왜와 화친해야 한다.
…네가 가 주어야겠다.

402년 3월, 실성왕은 왜와 화친을 맺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볼모로 보냈다.

『삼국사기』는, 내물왕을 원망하던 실성이 왜의 청을 거절하지 않고 미사흔을 보냈다고 적었다.

내물왕그대가 가 주어야겠다.

미사흔이 신라로 돌아오는 것은, 열여섯 해 뒤의 일이다.

412년, 실성왕은 내물왕의 또 다른 아들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볼모로 떠났던 사람이,
볼모를 보내는 왕이 되었다.

1946년 5월, 경주의 한 신라 무덤.

조사원흙 속에…
청동 그릇이 있다!

‘을묘년(415년)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 호우 십’. 광개토대왕의 이름을 새긴, 고구려의 청동 그릇이었다.

乙乙卯卯年年國國罡罡上上廣廣開開土土地地好好太太王王壺壺杅杅十十

이 그릇이 어떻게 신라로 와서 무덤에 묻혔는지는 알 수 없다.

400년, 고구려의 군대는 신라를 구했다.

그 뒤로 한동안 신라는 고구려의 큰 힘 아래 있었고, 왕자들은 볼모가 되어 길을 떠났다.

태왕의 이름을 새긴 그릇은,
그렇게 신라 땅에 남았다.

제21화 끝

역사 노트

이야기 속 장면은 이런 기록과 유적을 바탕으로 그렸어요.

  1. 광개토대왕릉비광개토대왕릉비 · 중국 지린성 지안

    비석에만 남은 400년

    400년(영락 10년)의 원정은 광개토대왕릉비에만 나와요. 『삼국사기』에는 고구려본기에도 신라본기에도 이 싸움이 없고, 신라본기의 400년 조에는 꼬리별과 왕의 말이 운 일만 적혀 있어요. 비석은 왕이 몸소 나선 싸움은 ‘몸소 이끌었다(躬率)’, 군대만 보낸 싸움은 ‘보냈다(敎遣)’로 구별해 적었는데, 400년은 ‘보냈다’예요. 고구려가 세운 비석이라 고구려군을 ‘관군’, 신라 왕을 ‘매금’이라 부르는 고구려 쪽 목소리이고, 이 대목은 지워진 글자가 특히 많아요.

    광개토대왕릉비 ·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물 이사금
  2. 광개토대왕릉비 탁본(부분)광개토대왕릉비 탁본(부분)

    임나가라와 ‘안라인수병’

    비석에 따르면 고구려군은 남거성에서 신라성(신라의 도읍)에 이르렀고, 왜의 뒤를 쫓아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까지 갔어요. 임나가라는 지금의 김해에 있던 금관가야로 보는 견해가 많지만, 남거성과 종발성이 어디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아요. 이 대목에 세 번 나오는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은 ‘안라(함안의 아라가야로 보는 견해가 많아요) 사람으로 이루어진 지키는 군사’로 읽기도 하고, ‘신라 사람을 두어 지키게 했다’로 읽기도 해요. 『일본서기』는 ‘임나’를 왜가 다스린 땅처럼 적었지만, 이 비문을 그런 뜻으로 읽는 옛 주장은 오늘날 학계에서 받아들이지 않아요.

    광개토대왕릉비
  3. ‘매금’이라는 이름

    비석은 신라 왕을 ‘매금(寐錦)’이라 불렀어요. 신라 왕의 칭호 ‘마립간’을 달리 적은 말로 보는 견해가 많고(‘이사금’과 같은 말로 보는 견해도 있어요), 524년 신라가 세운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도 법흥왕을 ‘매금왕’이라 적었어요. 『삼국사기』는 내물왕과 실성왕을 ‘이사금’이라 하고 눌지왕부터 ‘마립간’이라 했지만, 『삼국유사』 왕력은 내물왕부터 ‘마립간’이라 불렀어요(같은 책 기이 편은 지증왕 때부터라고 적어 엇갈려요). 비문의 ‘예전에는 신라 매금이 몸소 와서 아뢴 적이 없었는데…’ 다음은 글자가 지워져, 매금이 몸소 왔는지 사람을 보냈는지도 읽는 법이 갈려요.

    광개토대왕릉비 · 『삼국사기』 · 『삼국유사』 왕력
  4. 볼모 실성

    실성은 392년 고구려에 볼모로 갔다가 401년에 돌아왔고, 이듬해 내물왕이 세상을 떠나자 왕의 아들들이 어리다 하여 왕으로 세워졌어요. 왕이 된 실성은 402년 왜와 화친하며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왜에, 412년에는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어요. 『삼국사기』는 실성이 자기를 볼모로 보낸 내물왕을 원망해 그 아들들에게 앙갚음하려 했다고 적었고, 417년 내물왕의 아들 눌지가 실성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어요. 고구려에서 아홉 해를 지낸 실성의 즉위에 고구려의 힘이 작용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어요. 『삼국유사』는 미사흔(미해)이 390년 내물왕 때 열 살의 나이로 왜에 갔다고 적어, 『삼국사기』와 이야기가 달라요.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물·실성·눌지 · 『삼국사기』 박제상 열전 · 『삼국유사』
  5. 경주 호우총 청동 호우호우총 청동 호우의 밑바닥 글씨 · 국립중앙박물관

    호우총의 청동 그릇

    1946년 5월, 광복 뒤 우리 학자들이 처음으로 이끈 발굴(일본인 고고학자 아리미쓰 교이치가 기술을 도왔어요)에서 경주의 한 신라 무덤이 열렸어요. 뚜껑 덮인 청동 그릇(호우) 밑바닥에 ‘乙卯年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 열여섯 자가 네 줄로 새겨져 있었고, 무덤은 이 그릇의 이름을 따 ‘호우총’이라 불러요. 을묘년은 광개토대왕의 무덤에 비를 세운 이듬해인 415년이에요. 무덤은 그보다 100년쯤 뒤인 6세기 초에 만들어졌다고 봐요. 고구려의 제사에 참여한 신라 사람이 받아 왔다는 견해, 고구려에 볼모로 갔던 복호가 가져왔다는 견해 등이 있어요.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고, 2015년 보물로 지정되었어요.

    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 호우 (국립중앙박물관)
  6. 김해 대성동 고분군김해 대성동 고분군 · 금관가야의 지배층 무덤

    400년 원정이 남긴 것

    이 원정 뒤 고구려는 한동안 신라에 큰 힘을 미쳤어요. 고구려에서 돌아온 실성이 왕이 되고 복호가 볼모로 간 일, 신라 땅에서 나온 호우, 5세기에 세운 충주 고구려비가 신라 왕을 ‘매금’이라 부르며 그와 신하들에게 옷을 내려 준 일을 적은 것 등이 그런 사이를 보여 준다고 봐요. 왜를 쫓아 고구려군이 들이닥친 김해의 금관가야는 큰 타격을 입어, 그 뒤 가야의 중심이 차츰 고령의 대가야 쪽으로 옮겨 갔다고 보는 견해가 많아요.

    광개토대왕릉비 · 충주 고구려비
  7. 상상으로 그린 장면

    실성이 고구려군의 출정을 지켜보는 장면, 광개토대왕과 실성의 작별, 곡옥, 사신이 전한 계책을 듣는 내물왕, 신라성 안의 소년과 할아버지, 싸움과 추격의 모습, 왜가 배를 타고 달아나는 장면, 이름 없는 고구려 장수와 신라 군사, 1946년의 조사원들은 기록에 없는 상상이에요. 인물들이 주고받는 말도 기록을 바탕으로 지어낸 것이에요. 8월의 꼬리별과 10월에 운 말은 한 그림에 함께 그렸고, 고구려군이 지난 길과 남거성·종발성의 자리는 지도에 짐작으로만 그렸어요.

    광개토대왕릉비 · 『삼국사기』 신라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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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 영원한 태왕

후연과 밀고 밀리는 싸움, 동부여로 향하는 대군, 그리고 서른아홉의 이른 죽음. 414년, 아들 장수왕은 아버지의 무덤 곁에 거대한 비석을 세운다.

사진 출처

이 웹툰의 삽화는 모두 새로 그린 것이며, 등장인물의 이름과 대사는 역사적 사실과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상상해 재구성한 것입니다. 연대와 해석은 학계의 일반적인 설명을 따랐고, 의견이 갈리는 부분은 역사 노트에 밝혀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