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
제87화압록강에서 두만강까지
KO
제87화

압록강에서 두만강까지

세종 ⑤ · 4군 6진 · 1419~1450년
아래로 스크롤 ↓
🎧 소리와 함께 보면 더 생생해요.
장면마다 바람·모닥불·강물 소리가 바뀌고, 이야기 흐름을 따라 음악도 달라져요.
지난 이야기

1443년 겨울, 눈병을 앓던 세종은 스물여덟 글자를 지었다. 반대 상소가 올라오고, 임금과 왕비는 함께 초수리로 병을 다스리러 갔다. 1446년 3월 서른여덟 해를 함께한 소헌왕후가 먼저 세상을 떠났고, 그해 9월 『훈민정음』이 완성되었다. 임금은 왕비의 명복을 빌며 새 글자로 노래를 지었다 — 달이 천 개의 강에 비치는 노래, 『월인천강지곡』.

등장인물

세종조선의 넷째 임금
1450년 쉰네 살
김종서함길도 관찰사·도절제사
두만강가에 6진을 세웠다
최윤덕평안도 도절제사
압록강을 건너 여진을 쳤다
이종무1419년
대마도를 친 장수
황희영의정
늙은 임금의 오랜 신하

두만강가, 조선의 북쪽 끝.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만리 변성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 파람 큰 한 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 김종서가 지었다고 전하는 시조

그가 칼을 짚고 선 그 강가가, 오늘 우리가 아는 나라의 끝이 되었다.

세종의 시대가 열리던 무렵, 조선의 북쪽 끝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압록강과 두만강 언저리에는 여진의 여러 부족이 살았고, 국경 마을에는 말발굽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남쪽 바다에는 왜구가 있었다.

1419년 6월, 상왕 태종의 명으로 이종무가 이끄는 배 227척, 군사 1만 7천여 명이 왜구의 소굴 대마도로 건너갔다.

이종무삼군 도체찰사

그 뒤로 남쪽 바다의 왜구는 크게 줄었다.

1432년 겨울, 압록강 건너의 여진 기병들이 평안도 여연 고을을 덮쳤다. 많은 백성이 죽거나 끌려갔다.

이듬해 4월, 평안도 도절제사 최윤덕이 군사 1만 5천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파저강 일대의 여진을 쳤다.

최윤덕평안도 도절제사

압록강 위쪽 물줄기를 따라, 고을 넷이 차례로 세워졌다.

여연, 자성, 무창, 우예 — 4군.

동북쪽 두만강가는 더 멀고, 더 추웠다. 임금은 그 땅을 김종서에게 맡겼다.

김종서함길도 관찰사
세종강을 따라 성을 쌓고
백성을 살게 하라.
그곳이 우리 땅의 끝이다.

김종서는 두만강가로 갔다. 그 뒤 여러 해 동안, 그 땅을 지켰다.

강을 따라 성을 쌓고, 고을을 세웠다. 회령, 종성, 경원, 경흥, 온성, 부령 — 6진.

남쪽의 백성들이 집과 고향을 떠나, 눈 덮인 북쪽 끝으로 옮겨 갔다.

압록강 위쪽에는 4군, 두만강가에는 6진.

두 강의 물줄기가 이어지며, 한 줄의 선이 되었다.

오늘 우리가 아는 나라의 북쪽 끝이, 이때 그어졌다.

고향을 떠나는 길은 멀고 추웠다. 임금은 북쪽으로 옮겨 간 백성에게 세금과 부역을 덜어 주고, 그 땅 사람에게 벼슬을 주기도 했다.

아이아버지,
얼마나 더 가요?
아버지강이
보일 때까지.

임금은 김종서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세종내가 있었어도 김종서가 없었다면
이 일을 해내지 못했을 것이요,
김종서가 있었어도 내가 없었다면
이 일을 밀고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두 강에 성이 서는 동안, 임금은 늙어 갔다.

눈은 짓물러 앞이 잘 보이지 않았고, 몸 여기저기에 병이 깊었다.

그리고 1446년 봄,
서른여덟 해를 함께한 왕비가 먼저 떠났다.

임금은 아버지 태종의 무덤 서쪽에 왕비를 묻었다. 그리고 그 곁에, 자기가 누울 방을 하나 더 만들게 했다.

한 무덤 안의 두 방. 한쪽은 비어 있었다.

1448년 7월, 임금은 궁궐 곁에 작은 불당을 다시 짓겠다고 했다. 유교의 나라에서 무슨 일이냐며 대신들이 막아섰고, 성균관 유생들은 학교를 비우고 떠났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집현전 학자들마저 모두 자리를 떠나자 임금이 늙은 정승 황희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세종집현전 선비들이
나를 버리고 갔으니,
장차 어찌하면 좋겠소.

황희가 학자들의 집을 하나하나 찾아가 데려왔다고 한다. 불당은 그해 겨울, 끝내 지어졌다.

밤이면 늙은 임금은 낡은 책 한 권을 펼쳤다. 책장 사이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이 미끄러져 나왔다.

소헌왕후눈을 아끼소서.

1450년 2월 17일.

임금은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집에서 눈을 감았다. 쉰네 살이었다.

서른두 해 동안 임금이었다.

사관은 적었다. ‘그때 사람들이 해동의 요순이라 불렀다.’

그해 6월, 임금은 왕비 곁의 빈방에 누웠다.

네 해 동안 비어 있던 자리였다.

달이 떴다.

압록강 위에도, 두만강 위에도 — 김종서가 칼을 짚고 서 있던 성벽 위에도.

임금이 노래했듯, 하나의 달이 천 개의 강에 비쳤다.

그리고 한 무덤 위에도.

임금은 나라의 끝을, 두 강을 따라 그었다.

그리고 자기 삶의 끝은, 한 사람의 곁에 그었다.

1469년, 두 사람의 무덤은 지금의 경기도 여주로 옮겨졌다. 봉분 하나 아래, 두 사람은 지금도 나란히 누워 있다.

왕비로 산 스물여덟 해. 임금이 남긴 스물여덟 글자.

그 글자로 우리는 오늘도,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다.

제87화 끝

역사 노트

이야기 속 장면은 이런 기록과 유적을 바탕으로 그렸어요.

  1. 4군과 6진

    세종 때 압록강 위쪽에 여연·자성·무창·우예의 4군을, 두만강 아래쪽에 회령·종성·경원·경흥·온성·부령의 6진을 두었어요. 1433년 4월 평안도 도절제사 최윤덕이 1만 5천 군사로 압록강 건너 파저강 일대의 여진을 쳤고, 그해 말 함길도 관찰사가 된 김종서가 여러 해에 걸쳐 두만강가에 진을 세웠어요. 남쪽 백성을 옮겨 살게 하는 사민 정책과 그 지방 사람을 관리로 쓰는 토관 제도로 땅을 지켰어요. 4군은 지키기 어려워 단종·세조 때 일부 폐지되었지만, 압록강과 두만강을 잇는 오늘날의 북쪽 국경선이 이때 자리 잡았어요.

    『세종실록』 15년 4월·12월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대마도 정벌

    1419년(세종 1년) 6월, 왜구의 근거지를 없애려고 이종무가 병선 227척과 군사 1만 7천여 명을 이끌고 대마도를 쳤어요. 아직 군사권을 쥐고 있던 상왕 태종이 결정한 일이에요. 그 뒤 조선은 대마도주와 약조를 맺어 정해진 포구에서만 교역하게 했어요(1443년 계해약조).

    『세종실록』 1년 6월
  3. 김종서와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김종서(1383~1453)는 1433년 말 함길도 관찰사가 되고 뒤에 도절제사를 맡아, 여러 해 동안 6진 개척을 이끌었어요.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호기가)는 『청구영언』 등 뒷날의 시조집에 김종서의 작품으로 실려 전해요. ‘긴 파람’은 휘파람이에요. 세종이 ‘내가 있어도 김종서가 없었다면…’이라 했다는 말은 야사 『일월록』에 실려 『국조명신언행록』 등에 전해요(1440년 무렵의 일). 세종이 죽고 세 해 뒤인 1453년, 김종서는 수양대군(세조)이 일으킨 계유정난 때 죽임을 당했어요.

    『청구영언』 · 『세종실록』
  4. 여주 영릉(세종·소헌왕후 합장릉) 항공 사진여주 영릉(세종·소헌왕후 합장릉)

    한 무덤의 두 방, 영릉

    1446년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아버지 태종의 헌릉 서쪽 언덕에 능을 만들게 하며, 봉분 하나에 방을 둘 두는 ‘동분이실’로 정했어요. 그해 7월 19일 왕후를 동쪽 방에 모셨고, 서쪽 방은 임금 자신이 들어갈 ‘수실’로 비워 두었어요. 1450년 6월 12일 세종이 그 방에 묻혔고, 1469년(예종 1년) 지금의 경기도 여주로 옮겼어요. 2009년 조선 왕릉 40기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었어요.

    『세종실록』 28년 5월 8일·7월 19일 · 『문종실록』 즉위년 6월 12일 · 국가유산청
  5. 내불당과 집현전

    1448년 7월 세종은 궁궐 안 문소전 서북쪽에 불당을 다시 짓겠다고 했어요. 실록이 적은 까닭은 문소전에 있던 옛 불당이 옮기는 과정에서 헐린 채 되살리지 못했다는 것이었어요. 대간과 대신, 영의정 황희까지 반대했고 성균관 유생들은 학업을 그만두고 떠났지만, 세종은 굽히지 않아 그해 12월 불당을 완성했어요. 집현전 학자들마저 떠나자 세종이 황희에게 ‘집현전 선비들이 나를 버리고 갔으니 어찌하랴’ 하고, 황희가 그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데려왔다는 이야기는 실록의 그해 기사에는 없고, 1518년 조광조의 회고(『중종실록』)와 1727년의 회고(『영조실록』)에 전해요. 왕비와 두 아들을 잇달아 잃은 임금의 마음과 이어 보는 견해가 많아요.

    『세종실록』 30년 7월·12월 · 『중종실록』 13년 2월 2일 · 『영조실록』 3년 2월 3일
  6. 상상으로 그린 것

    늙은 임금이 『구소수간』 사이에 끼워 둔 왕비의 쪽지를 꺼내 보는 장면(83화·86화의 상상에 이어지는 이야기), 김종서를 보내며 임금이 한 말, 북쪽으로 옮겨 가는 가족의 말은 기록에 없어 지었어요. 세종이 김종서를 두고 한 말과 내불당 때 황희에게 한 말은 실록이 아닌 뒷날의 기록에 전하는 이야기예요.

    『세종실록』

이번 화의 열쇠말

다음 화 예고 · 준비 중

제88화 · 어린 왕과 사육신

세종이 떠나고 두 해 뒤, 문종마저 세상을 떠났다. 열두 살 단종이 왕위에 오르고 — 세종이 아끼던 아들 수양대군과 김종서, 그리고 집현전의 학자들이 서로 다른 길에 선다.

사진 출처

이 웹툰의 삽화는 모두 새로 그린 것이며, 등장인물의 이름과 대사는 역사적 사실과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상상해 재구성한 것입니다. 연대와 해석은 학계의 일반적인 설명을 따랐고, 의견이 갈리는 부분은 역사 노트에 밝혀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