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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화황산벌
제40화

황산벌

백제의 멸망 · 6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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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

가야 왕족의 후손 김유신은 열다섯에 화랑이 되었고, 열여덟에는 보검 한 자루를 들고 홀로 깊은 산에 들어가 하늘에 빌었다고 한다. 629년 낭비성에서 홀로 적진을 드나들어 이름을 떨쳤고, 648년에는 사로잡은 백제 장수 여덟을 내주고 대야성에서 목숨을 잃은 김춘추의 딸 부부의 뼈를 되찾아 왔다. 그리고 660년 5월, 예순여섯의 김유신은 왕이 된 김춘추(태종 무열왕)와 함께 백제를 치러 서라벌을 나섰다.

등장인물

계백백제의 장군 · 달솔
결사대 5천을 이끈다
의자왕백제의 왕
무왕의 맏아들
성충백제의 좌평
옥에서 마지막 글을 남겼다
관창신라의 화랑 · 열여섯 살
품일의 아들
품일신라의 좌장군
관창의 아버지
김유신신라의 대장군 · 상대등
예순여섯 살

660년 7월 9일, 황산벌.

계백백제의 장군 · 달솔

백제의 장군 계백은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고, 세 군데에 진을 쳤다. 그 건너편 동쪽에서 신라의 5만 대군이 몰려왔다.

백제의 결사대는 오천. 신라군은 그 열 배였다.

백제는 어쩌다 이 들판에서
나라의 운명을 막아서게 되었을까.

이야기는 네 해 전, 백제의 도읍 사비에서 시작된다.

656년 봄. 『삼국사기』는 이 무렵 의자왕이 궁인들과 어울려 향락에 빠지고,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적었다.

의자왕백제의 왕성충좌평 · 백제의 으뜸 벼슬
성충전하, 이제 그만
정사를 돌보소서!
의자왕듣기 싫다!
옥에 가두어라!

왕은 노하여 성충을 옥에 가두었다. 그 뒤로는 감히 바른말을 하는 신하가 없었다.

옥에 갇힌 성충은 날로 야위어 갔다. 죽음이 가까워지자, 그는 왕에게 마지막 글을 올렸다.

성충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으니,
한 말씀만 올리고 죽겠사옵니다.
炭峴탄현육로 · 신라에서 오는 길伎伐浦기벌포물길 · 바다에서 오는 길
성충의 글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옵니다.
다른 나라 군사가 오거든,
육로로는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시고,
물길로는 기벌포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험한 길목에 의지해 막아야
나라를 지킬 수 있사옵니다.

왕은 그 글을 살피지 않았다. 성충은 그렇게 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660년 여름, 귀신 하나가 궁궐에 들어와 외치고는 땅속으로 사라졌다고 『삼국사기』는 적었다. 그 자리를 파자, 등에 글이 쓰인 거북이 나왔다.

百濟同月輪新羅如月新
귀신의 소리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
거북 등의 글백제는 둥근 달 같고,
신라는 초승달 같다.
무당의 풀이둥근 달은 가득 차서
곧 기울고, 초승달은
점점 차오르옵니다.

무당의 풀이를 들은 왕은 노하여 그를 죽였다. 그러자 누군가 다른 풀이를 아뢰었다.

둥근 달은 성하다는 것, 초승달은 아직 약하다는 것.
우리나라는 성하고 신라는 약해진다는 뜻이옵니다.

왕은 그 말을 기뻐했다.

660년 3월, 당 고종은 장군 소정방에게 군사 13만을 주어 백제를 치게 했다. 6월, 소정방은 덕물도(지금의 덕적도)에서 신라 태자 법민을 만났다.

소정방당나라 대장군
소정방 (태자 법민에게)7월 10일, 백제 남쪽에서 대왕의 군사와 만나
의자의 도성을 깨뜨리겠소!

당나라 배들은 천 리에 이어져 바다를 건너왔다고 한다.

신라에서는 태자 법민과 대장군 김유신, 장군 품일·흠순 등이 정예 군사 5만을 이끌고 백제로 향했다.

김유신신라의 대장군 · 예순여섯 살품일신라의 좌장군관창품일의 아들 · 열여섯 살 화랑

관창은 아버지 품일의 부장으로 따라나섰다.

백제신라고구려서해금강탄현 (자리는 추정)덕물도 (덕적도)기벌포 (금강 어귀)웅진 (공주)서라벌신라의 도읍 · 5월 26일 출병사비백제의 도읍 (부여)황산벌7월 9일 · 계백의 결사대당군 13만산둥반도에서 바다로

두 나라 군사는 7월 10일에 만나 함께 백제의 도읍 사비를 치기로 했다. 당군은 바닷길로 기벌포를, 신라군은 땅으로 탄현을 넘어 온다.

적이 온다는 소식에 왕은 신하들을 모아 싸울 방도를 물었다.

좌평 의직당군은 바다를 건너와 지쳤사옵니다.
뭍에 오를 때 먼저 치소서!
달솔 상영아니옵니다!
신라군부터 쳐서
기세를 꺾으소서!

머뭇거리던 왕은, 죄를 짓고 고마미지현(지금의 장흥)에 귀양 가 있던 좌평 흥수에게 사람을 보내 물었다.

흥수귀양 가 있던 좌평
흥수백강과 탄현은 우리나라의
요긴한 길목이오. 한 사람이
창 한 자루로 막아도
만 명이 당하지 못하오.
용사를 보내 그곳을
지키게 하고, 대왕께서는
굳게 지키며 적이
지치기를 기다리시라
전하시오.

그러나 대신들은 흥수의 말을 믿지 않았다.

흥수는 오래 갇혀 지내 임금을 원망하니,
그 말을 쓸 수 없사옵니다.

적이 좁은 길로 들어온 뒤에 치면 새장 속의 닭,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잡듯 하리라는 것이었다. 왕은 그 말을 따랐다.

전령당군은 백강에 들고,
신라군은 탄현을
넘었사옵니다!
의자왕달솔 계백은 들으라!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으로 나가 막으라!

왕은 달솔 계백을 장군으로 삼아, 죽기를 각오한 군사 5천을 이끌고 나가 싸우게 했다.

황산벌에 이른 계백은 신라군과 맞붙기에 앞서, 군사들 앞에서 맹세했다.

계백한 나라로 당과 신라의 대군을 맞으니,
나라가 살아남을지 알 수 없다.
옛날 월나라 구천은
5천 군사로 오나라
70만 대군을 깨뜨렸다!
오늘 저마다 힘을 다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

김유신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쳐들어갔다.

一첫 번째二두 번째三세 번째四네 번째

네 번 싸워,

네 번 모두 백제군이 이겼다.

백제 군사는 한 사람이 천 사람을 당해 내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신라 군사들은 힘이 다해 갔다.

신라의 장군 김흠순이 아들 반굴을 불렀다.

김흠순 (김유신의 아우)신하에겐 충만 한 것이 없고,
자식에겐 효만 한 것이 없다.
위태로울 때 목숨을 바치면
충과 효를 함께 이룬다.
반굴삼가 명을 따르겠습니다.

반굴은 적진으로 뛰어들어 힘써 싸우다 죽었다.

이어 좌장군 품일이 아들 관창을 말 앞에 세우고, 장수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품일내 아들은 겨우 열여섯이나
뜻과 기개가 꽤 용감하오.
오늘 싸움에서
삼군의 본보기가
될 수 있겠느냐?
관창예!

관창은 갑옷 입힌 말에 창 한 자루를 들고, 곧장 적진으로 달려 들어갔다.

몇 사람을 쓰러뜨렸지만 적은 많고 자기편은 적어, 관창은 끝내 사로잡혔다.

사로잡힌 관창은 백제의 원수 계백 앞으로 끌려왔다.

계백투구를 벗겨라.
…아직 어린
소년이 아니냐.
계백신라에는 뛰어난 이가
많구나.
소년도 이러한데,
하물며 장정들이랴!
…살려 보내라.

계백은 어리고 용감한 소년을 차마 해치지 못했다.

살아 돌아온 관창이 말했다.

관창아까 적진에서 장수를 베고
깃발을 빼앗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다시 들어가면,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관창은 손으로 우물물을 떠 마신 뒤, 다시 말에 올라 적진으로 달려갔다.

관창은 다시 백제 진영으로 달려 들어왔다.

관창다시 들어가면,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다시 사로잡힌 관창을, 계백은 이번에는 살려 보내지 않았다.

관창이 타고 갔던 말이 신라 진영으로 돌아왔다.

품일나랏일에
목숨을 바쳤으니…
여한이 없다.
관창예!

이를 본 신라 군사들은 모두 죽기를 각오했다.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나아갔다.

백제군은 군사가 적고, 힘은 다했다.

계백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

계백은 그 들판에서 싸우다 죽었다.

좌평 충상과 상영 등 20여 명은 사로잡혔다.

같은 날, 소정방과 김인문이 이끄는 당군은 금강 어귀 기벌포에 닿았다.

진흙 갯벌에 버드나무 자리를 깔아 길을 내고 뭍에 올라, 막아선 백제군을 크게 깨뜨렸다.

황산벌을 지난 신라군이 당군 진영에 닿았다. 소정방은 약속한 날보다 늦었다며 크게 노했다.

소정방약속한 날을 어겼다!
신라의 독군 김문영을
군문에서 베어라!
김문영신라의 독군
김유신 (신라 군사들에게)대장군은 황산의 싸움은
보지도 않고, 늦은 것만
죄로 삼으려 한다!
죄 없이 욕을 당할 수는 없다.
먼저 당군과 결판을 내고
백제를 치겠다!

『삼국사기』는 이때 김유신의 허리에 찬 보검이 저절로 칼집에서 뛰쳐나왔다고 적었다.

소정방의 우장 동보량이 발을 밟으며 귀띔하자, 소정방은 김문영을 풀어 주었다.

7월 12일, 당군과 신라군이 사비성을 에워쌌다.

성충의 글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시고,
기벌포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의자왕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13일 밤, 의자왕은 측근들을 데리고 성을 빠져나가 웅진성으로 갔다.

왕이 떠난 사비성에서는 왕의 둘째 아들 태가 스스로 왕이 되어 성을 지켰다.

그러나 사람들은 줄을 타고 성을 빠져나갔고, 당군은 성가퀴에 올라 당나라 깃발을 꽂았다.

태도 끝내 성문을 열었다.

『삼국유사』에 실린 옛 기록은, 사비성이 무너질 때 궁녀들이 도성 북쪽 강가의 큰 바위에서 강물로 몸을 던졌다고 전한다.

그 바위는 뒷날 ‘꽃이 떨어진 바위’, 낙화암이라 불리게 되었다.

7월 18일, 의자왕은 웅진성에서 나와 항복했다. 8월 2일, 무열왕과 소정방은 잔치를 열고 의자왕에게 술을 따르게 했다.

태종 무열왕신라의 왕 · 김춘추

백제의 신하들은 모두 목메어 울었다.

8월 15일, 당나라 사람들은 사비 한가운데 절의 오층 석탑에 백제를 평정했다는 글, ‘대당평백제국비명’을 새겼다.

大唐平百濟國碑銘
무당둥근 달은 가득 차서
곧 기울고…

9월 3일, 소정방은 의자왕과 왕족·신하 93명, 백성 1만 2천 명을 배에 태워 사비를 떠났다.

그해 11월, 당나라 낙양에 끌려간 의자왕은 얼마 뒤 그곳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기원전 18년 한강 가에서 시작했다는 백제는
그렇게 무너졌다.

그러나 백제 사람들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40화 끝

역사 노트

이야기 속 장면은 이런 기록과 유적을 바탕으로 그렸어요.

  1. 논산 계백 장군 유적 전승지논산 계백 장군 유적 전승지 · 계백의 무덤으로 전하는 곳

    황산벌, 네 번의 싸움

    신라본기는 660년 7월 9일 김유신 등이 황산 들판에 나아가자 계백이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해 세 군영을 세우고 기다렸고, 신라군이 세 길로 나뉘어 네 번 싸웠으나 이기지 못했다고 적었어요. 백제본기는 ‘네 번 어울려 싸워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다해’ 졌다고 하고, 계백 열전도 네 번 맞붙은 끝에 힘이 다해 죽었다고 해요. 황산벌은 지금의 충남 논산 연산 일대의 들로 봐요. 세 군영이 정확히 어디였는지는 알 수 없고, 논산 부적면에는 계백의 무덤으로 전하는 묘와 그를 기리는 사당, 백제군사박물관이 있어요.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 『삼국사기』 열전 계백
  2. 부여 삼충사부여 삼충사 · 성충·흥수·계백을 모신 사당

    계백

    계백은 백제의 둘째 벼슬인 달솔이었어요. 열전에는 그가 결사대 5천을 가려 뽑고, 싸움에 앞서 ‘옛날 구천은 5천 명으로 오나라 70만 군사를 깨뜨렸다’며 군사들을 북돋웠다는 짧은 기록이 남아 있어요. 열전은 그가 싸움터로 떠나기 전 ‘처자가 노비가 되는 욕을 당하느니 죽는 것이 낫다’며 가족의 목숨을 먼저 거두었다는 비극도 적었는데, 이 화에서는 그리지 않았어요. 1957년 부여에 세운 삼충사에는 성충·흥수와 함께 백제의 충신으로 모셔져 있어요.

    『삼국사기』 열전 계백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관창과 반굴

    관창(645~660, 신라본기에는 ‘관장’)은 품일의 아들로, 열여섯에 아버지 밑의 부장이 되어 싸움에 나섰어요. 기록은 계백이 다시 붙잡힌 관창을 이번에는 살려 두지 않았다고 전하는데, 이 화는 주인 없이 돌아온 말만 그렸어요. 무열왕은 관창에게 급찬 벼슬을 내리고 예를 갖춰 장사 지냈어요. 반굴은 김유신의 아우 김흠순의 아들로, 반굴의 아들 김영윤도 684년 보덕성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고 싸우다 죽어 신문왕이 ‘이런 아버지가 없었다면 이런 아들도 없었으리라’ 했대요.

    『삼국사기』 열전 관창·김영윤 ·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4. 성충과 흥수, 탄현과 기벌포

    좌평 성충(정충이라고도 해요)은 656년 옥에서 숨을 거두기 전, 육로로는 탄현(침현)을, 물길로는 기벌포를 막으라는 글을 남겼어요. 귀양 가 있던 좌평 흥수도 660년에 백강과 탄현을 지키라고 했는데, 『삼국유사』는 흥수가 ‘대체로 성충의 말과 같다’고 답했다고 적었어요. 탄현이 어디인지는 대전 동쪽 식장산의 마도령, 완주 운주의 쑥고개, 금산 진산의 숯고개 등 여러 설이 있고, 기벌포는 금강 어귀로 봐요. 두 기록은 멸망 앞의 괴이한 징조도 여럿 적었는데, 이 화는 귀신과 거북 등의 글만 그렸어요.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 『삼국유사』 기이 태종춘추공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 부여 왕릉원(능산리 고분군)부여 왕릉원(능산리 고분군)

    사비성 함락과 의자왕

    신라본기는 7월 13일 의자왕이 밤에 웅진성으로 갔고, 18일 태자와 웅진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항복했다고 적었어요. 백제본기에는 둘째 아들 태가 스스로 왕이 되어 버티다 성문을 열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구당서』에는 대장 예식(예식진)이 의자왕을 데리고 와 항복했다고 적혀 있어, 그가 왕을 붙잡아 넘겼다고 보는 견해도 있어요. 9월 3일 소정방은 의자왕과 왕족·신하 93명, 백성 1만 2천 명을 데리고 당으로 돌아갔어요(백제본기는 88명과 1만 2,807명). 의자왕은 그해 당에서 병으로 죽어 낙양 북망산에 묻혔다고 하고, 2000년 그곳의 흙을 가져와 부여 왕릉원(능산리 고분군)에 가묘를 만들었어요.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6. 백마강 건너편에서 본 부여 낙화암백마강 건너편에서 본 부여 낙화암

    낙화암과 ‘삼천 궁녀’

    『삼국유사』가 옮긴 「백제고기」에는 의자왕이 후궁들과 함께 부여성 북쪽 강가의 큰 바위에서 강물에 몸을 던져 ‘타사암’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일연은 이를 잘못 전해진 말이라 하며, 떨어져 죽은 것은 궁인들이고 의자왕은 당에서 죽었다고 바로잡았어요. ‘삼천 궁녀’라는 말은 옛 기록에 없어요. ‘삼천’은 조선 전기 김흔의 시 「낙화암」에 처음 보인다는 문학적 표현으로, 실제 숫자로 보기는 어려워요.

    『삼국유사』 기이 태종춘추공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7. 정림사지 오층석탑 1층 몸돌의 글정림사지 오층석탑 1층 몸돌에 새긴 ‘대당평백제국비명’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글, 그리고 상상으로 그린 것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1층 몸돌 네 면에는 660년 8월 15일 당나라가 새긴 ‘대당평백제국비명’(하수량 지음, 권회소 씀)이 남아 있어요. 이 글 때문에 한때 탑을 ‘평제탑’이라 부르며 당나라가 세운 것으로 잘못 알기도 했지만, 탑은 그보다 앞선 백제 때 세운 것이에요. 이 화에서 사람들의 생김새와 옷 빛깔, 잔치·옥·귀양지의 모습, 성충과 의자왕이 잔치에서 주고받은 말, 계백의 ‘…아직 어린 소년이 아니냐’, 의자왕이 웅진으로 가는 밤길은 상상으로 그렸고, 황산벌에서 계백이 나지막이 한 탄식은 열전에서는 싸움터로 떠나기 전에 한 말이에요.

    대당평백제국비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번 화의 열쇠말

다음 화 예고 · 준비 중

제41화 · 백강에 지는 해

백제는 무너졌지만 사람들은 다시 일어섰다. 복신과 도침이 주류성에 모이고 왜에 가 있던 왕자 부여풍이 돌아와 왕이 되는데 — 663년 백강 어귀, 불타는 배들로 바다가 붉게 물든다.

사진 출처

이 웹툰의 삽화는 모두 새로 그린 것이며, 등장인물의 이름과 대사는 역사적 사실과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상상해 재구성한 것입니다. 연대와 해석은 학계의 일반적인 설명을 따랐고, 의견이 갈리는 부분은 역사 노트에 밝혀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