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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화김유신의 칼
제39화

김유신의 칼

김유신 · 5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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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리와 함께 보면 더 생생해요.
장면마다 바람·모닥불·강물 소리가 바뀌고, 이야기 흐름을 따라 음악도 달라져요.
지난 이야기

648년 김춘추는 바다 건너 당나라에 가서, 당 태종에게서 군사를 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돌아오는 바다에서는 따르던 온군해가 높은 관과 큰 옷 차림으로 배 위에 앉아 있다가, 그를 김춘추로 여긴 고구려 순라병에게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654년, 김춘추는 왕위에 올랐다. 태종 무열왕이다.

등장인물

김유신가야 왕족의 후손.
신라의 장수
서현김유신의 아버지.
김무력의 아들
만명김유신의 어머니.
신라 왕족의 딸
난승중악의 돌굴에
나타난 노인
문희김유신의
막내 누이
김춘추김유신의 벗.
뒷날의 태종 무열왕

648년, 군사를 청하러 당나라에 간 김춘추에게 당 태종이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당 태종너희 나라 유신의 이름을
들었다. 어떤 사람이냐?
김춘추유신은 재주와 지혜가
조금 있을 뿐이옵니다.
폐하의 위엄을 빌려야
이웃의 근심을 덜 수 있사옵니다.

당나라 황제도 그 이름을 들었다는 신라의 장수.

김유신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야기는 반세기를 거슬러, 그가 태어난 595년 무렵으로 돌아간다.

김유신의 집안은 본래 가야의 왕족이었다.

김구해증조할아버지 · 금관국 왕김무력할아버지 · 장군서현아버지

532년 금관국(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김구해가 신라에 항복했다. 그 막내아들 김무력은 신라의 장군이 되어 554년 관산성에서 백제군을 무찔렀다.

김무력의 아들 서현은 길에서 한 아가씨를 보고 마음을 빼앗겼다.

만명숙흘종의 딸
서현…누구일까?

만명은 진흥왕의 아버지 입종 갈문왕의 손녀였다. 두 사람은 중매도 거치지 않고 서로 마음을 나누었다.

서현이 만노군 태수가 되어 만명을 데려가려 하자, 그제야 이 일을 안 아버지 숙흘종은 크게 노했다.

숙흘종만명의 아버지
숙흘종내 허락도 없이!
별채에 가두고 지켜라!
만명아버님…
지키던 사내벼, 벼락이다!
서현어서!
만노군으로 가오!

벼락이 별채의 문을 때려 지키던 이들이 허둥대는 사이, 만명은 담 구멍으로 빠져나와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떠났다.

서현의 꿈두 별이…
내게로 내려온다!
만명의 꿈금 갑옷 입은 아이가
구름을 타고…!

『삼국사기』는 서현이 화성과 토성 두 별이 내려오는 꿈을, 만명이 금 갑옷을 입은 아이가 구름을 타고 집 안에 드는 꿈을 꾸었다고 전한다.

595년, 만명은 아이를 가진 지 스무 달 만에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서현경진일 밤,
좋은 꿈을 꾸고 얻은 아이요.
이 아이를
‘유신’이라 합시다!

날짜(경진·庚辰)로 이름을 짓지 않는 예법을 따라, 庚과 꼴이 닮은 庾(유), 辰과 소리가 비슷한 信(신)을 골랐다. 『삼국유사』는 아이의 등에 일곱 별 무늬가 있었다고 전한다.

609년, 열다섯 살 김유신은 화랑이 되었다.

김유신열다섯 살 · 화랑
김유신더 높이 오르자!

사람들이 기꺼이 그를 따랐다. 그 무리를 ‘용화향도’라 불렀다.

611년. 고구려와 백제, 말갈이 잇달아 신라 땅을 침범했다. 열일곱 살 김유신은 홀로 중악의 돌굴에 들어갔다.

김유신적국이 승냥이와 범처럼
우리 땅을 어지럽힙니다.
보잘것없는 몸이지만, 하늘이시여
제게 힘을 빌려주소서!

그는 몸을 깨끗이 하고 하늘에 맹세했다.

나흘째 되던 날, 거친 베옷을 입은 노인이 찾아왔다.

노인독충과 맹수가 들끓는 곳에,
귀한 소년이 어찌 홀로 있소?
김유신어르신은 뉘신지요?
존함을 여쭙고 싶습니다.
난승나는 머무는 곳 없이 인연 따라 다니오.
이름은 난승이라 하오.
김유신나라를 지킬 방술을
가르쳐 주소서!

노인은 말이 없었다. 김유신은 눈물을 흘리며 예닐곱 번이나 거듭 청했다.

난승그대는 어린 나이에 세 나라를
아우를 마음을 품었구나. 장하도다.
함부로 전하지 마라. 의롭지 않게 쓰면,
도리어 재앙을 받으리라.

말을 마친 노인은 떠났다. 이 리(里)쯤 갔을 무렵, 김유신이 뒤쫓아 가 바라보았지만—

노인은 보이지 않고, 산 위에 오색 빛만 찬란했다.

이듬해 612년, 이웃 나라의 위협이 더욱 거세지자, 열여덟 살 김유신은 보검 한 자루를 들고 홀로 열박산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

김유신하늘이시여,
다시 비옵니다…

그는 향을 피우고, 중악에서처럼 하늘에 빌고 또 빌었다.

사흘째 밤, 허성과 각성 두 별의 빛살이 환하게 아래로 드리워졌다.

난승의롭지 않게 쓰면,
도리어 재앙을 받으리라.

칼이 저절로 흔들리는 것 같았다고 한다.

백석과 세 호국신

『삼국유사』가 전하는 옛이야기

국선 김유신의 무리에 백석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몰래 적국을 엿보러 가자는 그의 말에, 김유신은 밤길에 나섰다.

세 여인우리는 나림·혈례·골화를
지키는 신이오.
적국 사람이 그대를
꾀어 데려가고 있소!

가는 길에 만난 세 여인이 그를 숲으로 이끌더니, 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김유신은 두고 온 문서를 핑계로 집에 돌아와, 백석을 묶고 캐물었다.

백석나는 본래
고구려 사람이오…
고구려가 그대를
해치려고 나를 보냈소.

김유신은 백석을 벌하고, 갖은 음식을 차려 세 신에게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몇 해 뒤 어느 아침, 김유신의 누이 보희가 꿈 이야기를 꺼냈다. 서쪽 산에 올라 오줌을 누었더니—

보희서울이 물에
잠겼지 뭐야!
문희언니, 그 꿈
나한테 팔아!

문희는 비단 치마를 주고 언니의 꿈을 샀다.

며칠 뒤, 김유신은 집 앞에서 벗 김춘추와 공차기(축국)를 하다가 그의 옷자락을 밟아 옷끈을 떨어뜨렸다.

김춘추어, 옷끈이…!
김유신이런, 내가 밟았구려.
우리 집이 가까우니
들어가 꿰매시지요.

『삼국유사』는 김유신이 일부러 그랬다고 전한다.

김유신은 누이 보희에게 옷끈을 꿰매 드리라 했지만, 보희는 나오지 않았다.

보희하찮은 일로 어찌
귀한 분 곁에 가겠어요…
문희김유신의 막내 누이
김춘추…!

대신 나온 막내 문희는 옅은 화장에 수수한 차림이었지만, 눈부시게 고왔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문희가 아이를 갖자 김유신은 ‘누이를 불태우겠다’고 짐짓 소문을 내고, 여왕이 남산에 오르는 날 마당에 연기를 피웠다.

선덕여왕…네가 한 일이로구나.
어서 가서 구하라!

얼굴빛이 확 변한 김춘추는 말을 달려 가 여왕의 명을 전했고, 두 사람은 떳떳이 혼례를 올렸다.

그로부터 몇 해 뒤.

629년 가을, 신라는 고구려의 낭비성을 쳤다.

장군 서현, 그리고 서른다섯 살의 아들 김유신도
그 싸움터에 있었다.

고구려군이 성에서 나와 맞받아치자, 신라군은 많은 군사를 잃고 싸울 마음마저 잃었다.

신라 군사물러나라!
물러나!

중당의 당주였던 김유신은 아버지 앞에 나아가 투구를 벗었다.

서현아버지 · 장군
김유신평생 충과 효를 지키려 했으니,
싸움에서 비겁할 수 없습니다.
옷깃을 들어야 갖옷이 펴지고,
벼리를 당겨야 그물이 펼쳐지는 법.
제가 그 옷깃과
벼리가 되겠습니다!

김유신은 말에 올라 칼을 뽑고, 구덩이를 뛰어넘어 적진으로 내달렸다.

『삼국사기』 본기는 그가 세 번 들어갔다 세 번 나오며, 그때마다 장수를 베거나 깃발을 빼앗았다고 적었다.

신라군이 북을 울리며 뒤따라 들이쳤다.

서현장하다, 내 아들…

5천여 명을 베고 1천 명을 사로잡자, 낭비성 사람들은 두려워 모두 나와 항복했다.

642년, 백제가 신라의 대야성을 무너뜨렸다.

도독 김품석과 그의 아내 고타소가 목숨을 잃었다. 고타소는 김춘추의 딸이었다.

두 사람의 뼈는
백제 땅 감옥에 묻혔다.

648년, 압량주의 군주 김유신은 몇 달째 술을 마시고 풍악을 즐기며 지냈다.

김유신…이제 백성들 힘이
넉넉해졌구나.
고을 사람다들 오래 쉬어 힘이 남아도는데,
장군은 저리 게으르니!

『삼국사기』 열전은 이때를 김춘추가 당나라에 가 있던 무렵이라고 적었다.

김유신민심을 보니 싸울 만합니다.
대야성의 원수를
갚게 해 주소서.
진덕여왕선덕여왕의 뒤를 이은 왕
진덕여왕작은 나라로 큰 나라를
건드리다 위태로우면
어찌하오?
이기고 짐은 크고 작음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 달렸사옵니다.

김유신은 대야성 밖에서 백제군과 맞서다가, 짐짓 진 척 옥문곡까지 물러났다.

김유신지금이다, 쳐라!

얕잡아 본 백제군이 몰려들자 숨어 있던 신라군이 앞뒤에서 들이쳐, 백제의 장수 여덟을 사로잡았다.

김유신의 전갈우리 군주 품석 부부의 뼈가
너희 감옥에 묻혀 있다.
죽은 두 사람의 뼈와
너희 장수 여덟을 바꾸자.
좌평 충상신라 사람의 해골은
두어도 쓸데없으니,
돌려보내시지요.

백제는 품석 부부의 뼈를 파내어 나무 궤에 담아 보냈다.

김유신나뭇잎 하나 떨어진다고
무성한 숲이 줄지 않고,
티끌 하나 모인다고
큰 산이 커지지 않는 법.

김유신은 약속대로 백제 장수 여덟을 살려 보냈다.

당나라에 갔던 김춘추가 돌아왔다.

김춘추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렸다더니,
살아 돌아와 공을 다시 보는구려.
김유신품석 공과 부인의 뼈를 고향에
모셔 왔습니다. 하늘이 도운 것이지,
제 힘이 아닙니다.

품석 부부의 뼈는 그렇게 고향 땅으로 돌아왔다.

김춘추고타소야…

대야성이 무너진 지 여섯 해 만이었다.

654년, 진덕여왕이 세상을 떠났다.

김유신은 재상 알천과 뜻을 모아, 김춘추를 왕으로 맞았다.

태종 무열왕이다.

660년 정월, 김유신은 상대등이 되었다. 5월 26일, 무열왕과 김유신은 군사를 이끌고 서라벌을 나섰다.

김유신예순여섯 살 · 상대등
난승그대는 어린 나이에
세 나라를 아우를 마음을 품었구나.

당나라 소정방의 13만 대군도 곧 바다를 건너올 참이었다.

열여덟 살 때 별빛을 받았다는 칼.

그 칼을 품었던 소년이, 이제 예순여섯의 장수가 되어 백제로 향한다.

7월, 황산벌에서 백제의 장군 계백이
오천 결사대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제39화 끝

역사 노트

이야기 속 장면은 이런 기록과 유적을 바탕으로 그렸어요.

  1. 산청 전 구형왕릉산청 전(傳) 구형왕릉 · 금관국 마지막 왕의 무덤으로 전하는 돌무덤

    가야 왕족의 후손

    『삼국사기』 열전은 김유신을 금관가야를 세운 수로왕의 12대손이라 했어요. 증조할아버지는 532년 신라에 항복한 금관국의 마지막 왕 김구해(열전에는 ‘구충’, 「가락국기」에는 ‘구형왕’), 할아버지는 554년 관산성 싸움에서 이름을 떨친 김무력, 아버지는 서현이에요. 어머니 만명은 진흥왕의 아버지 입종 갈문왕의 손녀로, 만명의 아버지 숙흘종이 두 사람 사이를 반대해 딸을 가두었는데 벼락이 내리친 틈에 빠져나갔다는 이야기가 열전에 실려 있어요. 가야 왕족의 후손이 신라 왕실과 맺어진 이 혼인은, 가야계 집안이 신라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길이 되었다고 보기도 해요.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상 ·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진흥왕
  2. 스무 달 만에 태어난 아이

    열전은 서현이 경진일 밤에 화성과 토성이 내려오는 꿈을, 만명이 신축일 밤에 금 갑옷을 입은 아이가 구름을 타고 들어오는 꿈을 꾸고 아이를 가져 스무 달 만에 낳았다고 전해요. 595년(진평왕 17년)의 일이에요. 서현은 꿈꾼 날 ‘경진’ 대신 글자 꼴이 닮은 ‘유’와 소리가 비슷한 ‘신’을 골랐고, 옛 어진 사람 가운데 같은 이름이 있다는 것도 까닭으로 들었어요. 그가 태어난 만노군은 지금의 충북 진천으로, 열전은 그의 태를 묻은 산을 ‘태령산’이라 부른다고 적었어요. 『삼국유사』는 그의 등에 일곱 별 무늬가 있었다고 덧붙였어요.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상 · 『삼국유사』 기이 김유신
  3.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 (국보) · 국립중앙박물관

    화랑과 용화향도

    『삼국사기』는 김유신이 열다섯에 화랑이 되자 사람들이 기꺼이 따랐고, 그 무리를 ‘용화향도’라 불렀다고 적었어요. ‘용화’는 미래의 부처 미륵이 용화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데서 온 말로, 화랑을 미륵과 이어 보던 신라 사람들의 믿음을 보여 준다고 풀이해요. 『삼국유사』는 열여덟 살이던 612년에 ‘국선’이 되었다고 해 나이가 조금 달라요. 젊은 날 천관이라는 여인과의 인연을 끊었다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두 책에 없고, 훨씬 뒤의 책에 전하는 전설이에요.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상 · 『삼국유사』 기이 김유신
  4.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 중악으로 보는 단석산

    칼과 별 — 중악과 열박산

    중악의 노인 난승(611)과 열박산의 보검에 내린 별빛(612)은 『삼국사기』 열전에 실린 전설이에요. 열전은 김유신의 현손 김장청이 지은 『행록』 열 권을 김부식이 ‘지어낸 말이 많아’ 덜어 내고 쓸 만한 것만 골라 지은 것이라, 집안에 전하던 이야기가 많이 담겼어요. 경주 단석산 신선사의 바위 굴은 예로부터 김유신이 수련한 곳으로 알려졌고, 1969년 조사 뒤로 이곳을 ‘중악의 돌굴’로 보는 견해가 널리 퍼졌어요(바위에 불상과 400자 남짓한 글이 새겨진 국보). 다만 『삼국사기』 제사지가 꼽은 ‘중악’은 부악(공산, 지금의 팔공산)이라, 김유신 때의 중악을 달리 보는 의견도 있어요. 열박산이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아요. 『삼국유사』의 백석 이야기에 나오는 나림·혈례·골화는 신라가 큰 제사를 올리던 세 산이에요. 648년 당 태종이 김유신을 물었다는 대화도 김유신 열전에만 있어요.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상 ·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하 · 『삼국유사』 기이 김유신 · 『삼국사기』 잡지 제사
  5. 『삼국유사』『삼국유사』

    꿈을 산 문희

    언니 보희의 꿈을 비단 치마를 주고 산 문희가 김춘추의 아내가 된 이야기는 『삼국사기』(문무왕 조)와 『삼국유사』(태종춘추공 조)에 모두 실려 있어요. 『삼국사기』에는 서형산 꼭대기의 꿈, 공을 차다 김춘추의 옷끈을 밟아 떨어뜨린 일, 옅은 화장의 문희가 옷끈을 꿰매자 김춘추가 혼인을 청한 일까지만 나와요. 연기를 피워 여왕의 눈에 띄게 한 꾀는 『삼국유사』에만 있는데, 이를 선덕여왕 때 일로 적었어요. 그런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둘째 아들 김인문이 629년에 태어났으니, 혼인은 선덕여왕이 즉위한 632년보다 앞선 일이었을 거예요. 문희는 문명왕후가 되었고, 『삼국유사』는 문무왕(법민)과 김인문 등 여섯 아들이 모두 그녀가 낳은 아들이니 ‘꿈을 산 징조가 나타났다’고 했어요.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 열전 김인문 · 『삼국유사』 기이 태종춘추공
  6. 낭비성, 그리고 뼈와 포로

    629년 낭비성 싸움은 본기와 열전이 조금 달라요. 본기는 김유신이 부장군으로서 세 번 들고 나며 장수를 베거나 깃발을 빼앗았다고 했고, 열전은 중당의 당주였던 그가 구덩이를 뛰어넘어 적장의 목을 베어 왔다고 했어요. 낭비성의 자리는 조선 시대 지리책처럼 지금의 청주로 보는 견해와, 이 무렵 두 나라의 경계를 따져 경기 북부로 보는 견해가 엇갈려요. 648년 옥문곡 싸움은 백제본기에도 4월의 일로 짧게 나와 김춘추가 당나라로 떠난 그해 겨울보다 앞서고, 품석 부부의 뼈를 백제 장수 여덟과 바꾼 이야기는 열전에만 있어요. 백제 좌평의 이름은 열전 본문에 ‘중상’, 작은 주에 ‘충상’으로 나와요. 열전은 대야성 밖에서 싸웠다고만 하고 이때 성을 되찾았다고 분명히 적지는 않았는데, 661년에는 대야에 신라의 도독을 둔 기록이 보여요.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평왕·태종무열왕 · 백제본기 의자왕 ·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7. 경주 김유신 묘경주 김유신 묘 (사적)

    흥무대왕과 김유신 묘, 그리고 상상으로 그린 것

    김유신은 673년 79살로 세상을 떠나 금산원에 묻혔어요. 『삼국사기』는 흥덕왕(재위 826~836)이, 『삼국유사』는 경명왕(재위 917~924)이 그를 ‘흥무대왕’(『삼국유사』는 고려 혜종의 이름 ‘무’를 피해 ‘흥호대왕’)으로 높였다고 적어, 신하가 대왕으로 높여진 드문 예가 되었어요. 경주 충효동 송화산 기슭의 김유신 묘(사적)는 둘레돌에 평복 차림으로 무기를 든 십이지신상을 새겼는데, 이 무덤의 주인을 신무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어요. 이 화에서 서현·만명·숙흘종·난승·보희·문희의 모습과 말투, 장안·압량주·백제 궁궐의 장면, 김춘추가 딸의 무덤 앞에 선 장면은 상상으로 그렸어요.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하 · 『삼국유사』 기이 김유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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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화 · 황산벌

660년 7월, 황산벌. 백제의 장군 계백은 오천 결사대로 신라의 5만 대군을 네 번이나 막아 낸다. 꺾이지 않는 백제군 앞에, 열여섯 살 화랑 관창이 홀로 말을 달려 나가는데 —

사진 출처

이 웹툰의 삽화는 모두 새로 그린 것이며, 등장인물의 이름과 대사는 역사적 사실과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상상해 재구성한 것입니다. 연대와 해석은 학계의 일반적인 설명을 따랐고, 의견이 갈리는 부분은 역사 노트에 밝혀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