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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서동의 노래
제27화

서동의 노래

백제 무왕 · 600년 ~ 64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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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리와 함께 보면 더 생생해요.
장면마다 바람·모닥불·강물 소리가 바뀌고, 이야기 흐름을 따라 음악도 달라져요.
지난 이야기

지난 화에서는 백제의 성왕을 만났다. 538년 도읍을 사비로 옮겨 나라 이름을 ‘남부여’라 하고 551년 한강 가의 옛 땅을 되찾았지만, 553년 함께 싸운 신라가 그 땅을 빼앗았다. 이듬해 관산성 싸움 때 왕은 구천의 밤길에서 신라 복병에게 목숨을 잃었고, 맏아들 창이 왕위를 이었다.

등장인물

서동『삼국유사』 속
마를 캐는 아이
무왕백제의 서른 번째 왕
(600~641) · 법왕의 아들
선화 공주『삼국유사』 속
진평왕의 셋째 공주
진평왕신라의 왕 (579~632)
무왕과 오래 맞섰다
지명법사『삼국유사』 속
용화산 사자사의 스님
사택 왕후금판 한 장에
‘사택적덕의 딸’로
남은 백제 왕후

창(위덕왕)은 마흔 해 넘게 백제를 다스렸다. 그 뒤를 이은 혜왕과 법왕은 잇달아 두 해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600년, 법왕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백제의 서른 번째 왕, 무왕이다.

그런데 『삼국유사』는 이 왕의 어린 시절을, 전혀 다른 이야기로 전한다.

마를 캐는 아이

『삼국유사』 기이 편 「무왕」 조에 전하는 서동 이야기

옛날, 백제의 서울 남쪽 못가에 홀로 사는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그 못의 용과 인연을 맺어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아이는 늘 산에서 마를 캐어 팔아 살았다. 사람들은 그를 ‘서동’, 곧 ‘마 캐는 아이’라 불렀다.

서동마를 캐는 아이
아낙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님 말이야,
세상에 둘도 없이 아름답대!
서동선화 공주…

서동은 머리를 깎고 신라의 서울 서라벌로 갔다. 그리고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었다.

서라벌 아이들
아이형, 마 또 줘요!
서동그 대신, 노래 하나
배워 볼래?

아이들은 서동이 가르쳐 준 노래를 부르며 골목골목을 뛰어다녔다.

선화 공주님은
남몰래 시집가 두고
서동 서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善化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卯乙抱遣去如 — 「서동요」, 『삼국유사』

아이들♪ 선화 공주님은
남몰래 시집가 두고,
서동 서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서라벌 사람아니, 저게 무슨 노래야?!

노래는 온 서울에 퍼져, 마침내 궁궐 안까지 들어갔다.

진평왕신라의 왕 · 공주의 아버지선화 공주진평왕의 셋째 공주
신하들공주님 노래가 온 서울에
퍼졌사옵니다!
진평왕……

신하들은 공주를 멀리 내쳐야 한다고 거세게 간했다. 공주는 먼 곳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떠나는 날, 왕후는 딸에게 순금 한 말을 내주었다.

왕후이것이라도 가져가거라…
선화 공주어머니…

귀양 가는 곳에 거의 닿았을 때, 길에서 한 젊은이가 나와 절을 했다.

서동공주님,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 몰랐지만, 어쩐지 믿음이 가고 기뻤다. 둘은 함께 길을 갔다.

선화 공주그대 이름이 무엇인가요?
서동서동이라 합니다.
서동…? 그 노래 속의…!

함께 길을 가는 동안 둘은 가까워졌다. 이름을 듣고서야, 공주는 그 노래가 들어맞았음을 알았다.

둘은 함께 백제로 왔다. 공주가 어머니에게 받은 금을 꺼내 살아갈 일을 의논하자, 서동이 크게 웃었다.

서동하하하!
이게 다 뭐요?
선화 공주황금이에요!
백 년은 넉넉히 살 수 있어요.
이런 건 내가 마 캐던 데에
흙처럼 쌓여 있소.
천하의 보배예요! 이 금을
우리 부모님 궁궐로 보내면 어때요?

둘은 금을 언덕처럼 모아,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찾아갔다.

지명법사용화산 사자사의 스님
지명법사내 신통력으로 옮길 수 있소.
금을 가져오시오.

공주가 부모님께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두자,

법사는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금을 신라 궁궐로 옮겨 놓았다.

진평왕하룻밤 새에…
이 많은 금이?
선화야…

진평왕은 그 신통한 일에 놀라 서동을 더욱 높이 여기고, 늘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서동은 이 일로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어느 날, 왕과 왕비가 사자사로 가다가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렀다.

왕비이곳에 큰 절을 세우는 것이
제 소원이에요.

그때 못 가운데서, 미륵 삼존이 솟아올랐다.

지명법사는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웠다.

그 자리에 미륵이 세 번 설법하는 모습을 본떠 전각과 탑과 회랑을 세 곳에 세우고, ‘미륵사’라 했다. 진평왕도 온갖 장인을 보내 도왔다고 한다.

『삼국유사』는 이 이야기 끝에, 작은 글씨로 이렇게 덧붙여 두었다.

『삼국사기』에는 법왕의 아들이라 했는데,
이 이야기에서는 홀어머니의 아들이라 하니,
알 수 없다.

三國史云 是法王之子 而此傳之獨女之子 未詳 — 『삼국유사』

『삼국사기』는 무왕을 법왕의 아들이라 적었다. 이름은 장(璋). 풍채가 빼어나고, 뜻과 기개가 호걸스러웠다고 한다.

무왕법왕의 아들 · 백제의 새 왕
무왕백제의 이름을,
다시 드높이겠다.

602년 8월, 무왕은 군사를 내어 신라의 아막산성을 에워쌌다. 그러나 진평왕이 보낸 날랜 기병 수천에 밀려 물러났다.

신라는 오히려 국경 가까이에 소타·외석·천산·옹잠, 네 성을 새로 쌓아 백제 땅을 위협했다.

왕은 노했다.

무왕좌평 해수는 보병과 기병 4만을 이끌고,
그 네 성을 쳐라!
해수좌평 · 백제의 장수
해수명을 받들겠나이다!

싸움이 불리하자, 해수는 천산 서쪽의 큰 못으로 물러나 군사를 숨겨 두고 기다렸다.

해수지금이다! 쳐라!

뒤쫓아 온 신라 장수 무은이 말에서 떨어졌다. 그러나 무은의 아들 귀산과 그 벗 추항이 물러서지 않고 싸우자, 신라군이 다시 일어났다.

백제군은 크게 졌다.

해수는 겨우 목숨을 건져, 홀로 말을 타고 돌아왔다.

그 뒤로도 두 나라의 싸움은 그치지 않았다.

백제신라서해동해남해금강낙동강소백산맥사비 · 백제의 도읍웅진 (공주)익산용화산 · 미륵사서라벌신라의 도읍 (경주)아막성602 · 616년 · 지금의 남원 동쪽나라의 경계와 위치는 대략이며학자마다 의견이 다르다

611년에는 신라의 가잠성을 백 일 동안 에워싸 빼앗고, 616년에는 다시 아막성을 쳤다. 624년에는 신라의 여섯 성을 차지했다.

627년 가을, 무왕은 신라에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 군사를 크게 일으켜 웅진에 진을 쳤다.

무왕이번에야말로
빼앗긴 땅을 되찾는다!

소식을 들은 진평왕이 당에 사신을 보내 급함을 알리자, 무왕은 군사를 멈추었다.

그해 8월, 왕의 조카 복신이 당에 사신으로 갔다. 당 태종은 복신에게 신라와 화해하라고 이르고, 왕에게도 글을 내렸다.

복신무왕의 조카
당 태종의 글‘신라 왕 김진평은 짐의 번신이요,
왕의 이웃 나라라.’
‘지난 원한을 잊고 이웃의 정을
도타이 하여, 곧 싸움을 그치라.’
무왕……

무왕은 사신을 보내 사례했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적었다. ‘겉으로는 명을 따른다 했으나, 속으로는 여전히 서로 원수로 여겼다.’

이야기 속에서는 장인과 사위였던 신라의 진평왕과 백제의 무왕.

기록 속의 두 왕은,
서른 해 가까이 서로를 겨누었다.

632년 정월, 무왕은 맏아들 의자를 태자로 세웠다. 같은 달, 신라의 진평왕이 세상을 떠났다.

634년 2월, 사비의 강가에 왕흥사가 완성되었다. 채색한 장식이 웅장하고 화려했다.

왕은 늘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 향을 피웠다.

3월, 왕은 궁궐 남쪽에 못을 팠다. 스무 리 넘는 곳에서 물을 끌어오고, 네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었다.

무왕신선이 산다는 산이,
저러할까.

물 가운데에는 섬을 쌓아, 신선이 산다는 방장산을 본떴다.

636년 3월, 왕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사비하 북쪽 포구에서 잔치를 열었다. 양쪽 언덕의 기이한 바위와 꽃이 그림 같았다.

왕은 술을 마시며 몹시 즐거워 거문고를 타며 스스로 노래했고, 따르는 이들은 여러 번 춤을 추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대왕포’라 불렀다.

무왕♪ ♬ ♪

그날 왕이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는, 어떤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다.

옛 노래선화 공주님은…

639년 정월 29일, 익산 미륵사. 쌓아 올리던 서쪽 돌탑 한가운데 돌기둥에 사리를 모셨다.

백제 왕후무왕의 왕비
왕후대왕 폐하의 목숨이
산처럼 굳건하시기를…

금 사리 항아리 곁에는, 글을 새긴 금판 한 장이 함께 놓였다.

641년 3월, 무왕이 세상을 떠났다.

왕후대왕 폐하의 목숨이 산처럼 굳건하시기를…

당 태종은 현무문에서 슬픔을 표하고 그를 광록대부로 높였다. 왕위는 맏아들 의자가 이었다.

절은 백제가 무너진 뒤에도 오래 이어졌지만, 언젠가 폐허가 되었다. 서쪽 돌탑은 반쯤 무너진 채 남았다.

2001년, 무너질 듯한 그 탑을 고치려고 돌을 하나하나 내려 해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9년 1월 14일.

1층 한가운데 돌기둥(심주석) 위의 돌을 들어 올리자, 돌기둥 윗면에 네모난 구멍이 드러났다.

조사원구멍 안에…
뭔가 있어요!
…금빛이야.

손바닥만 한 금판의 앞뒤에, 190자 남짓한 글이 새겨져 있었다.

조사원‘우리 백제 왕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
‘깨끗한 재물을 내어
가람을 세우고…’
‘기해년 정월 스무아흐레,
사리를 받들어 맞이하였다.’
노래 속 공주이곳에 큰 절을 세우는 것이 제 소원이에요.
금판 속 왕후깨끗한 재물을 내어, 가람을 세우고…

금판에 따르면, 재물을 내어 가람을 세우고 이 탑에 사리를 모신 왕후는 백제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었다.

노래 속 공주는 신라 서라벌에서 왔다. 금판 속 왕후는 백제 좌평의 딸이었다.

노래 속 공주는 지어낸 이야기였을까,
아니면 금판보다 앞서 있었던
또 한 사람의 왕비였을까.

천사백 년을 건너온 노래와, 탑 속에서 1,370년을 기다린 금판 한 장은 아직 그 답을 알려 주지 않는다.

제27화 끝

역사 노트

이야기 속 장면은 이런 기록과 유적을 바탕으로 그렸어요.

  1. 『삼국유사』『삼국유사』 · 서울대학교 규장각

    『삼국유사』가 전하는 서동 이야기

    서동 이야기는 『삼국유사』 기이 편 「무왕」 조에 실려 있어요. 일연은 제목 아래에 ‘옛 책(고본)에는 무강왕이라 했는데, 백제에는 무강왕이 없으니 잘못’이라고 적고, 이야기 끝에는 ‘『삼국사기』는 법왕의 아들이라 했는데 이 이야기는 홀어머니의 아들이라 하니 알 수 없다’고 덧붙였어요. 선화 공주는 『삼국사기』에 보이지 않아요(『삼국사기』에 나오는 진평왕의 딸은 맏딸 덕만, 곧 선덕여왕과 김춘추의 어머니 천명부인이에요). 그래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을 무왕이 아닌 동성왕이나 무령왕으로 보거나, 여러 이야기가 한데 엮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어요.

    『삼국유사』 기이 「무왕」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서동요 — 향찰로 적은 노래

    서동이 퍼뜨렸다는 노래는 한자의 소리와 뜻을 빌려 우리말을 적은 향찰로 남아 있어요: ‘善化公主主隱 / 他密只嫁良置古 / 薯童房乙 / 夜矣卯乙抱遣去如’. 네 줄로 된 향가(4구체)로, 이 화의 풀이(‘선화 공주님은 남몰래 시집가 두고, 서동 서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는 양주동의 읽기를 바탕으로 한 오늘날의 일반적인 풀이예요. ‘薯童房乙’은 양주동의 읽기를 따라 흔히 ‘맛둥 서방을’로 푸는데(‘맛둥’은 마를 캐는 아이, 곧 서동), 김완진은 ‘서동의 방을’로 읽어요. ‘卯乙’도 양주동은 ‘몰(래)’로, 김완진은 ‘卵(알)’을 잘못 적은 글자로 보아 ‘알을’로 읽는 등 학자마다 달라서, 다른 풀이도 여럿 있어요.

    『삼국유사』 기이 「무왕」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동요」
  3. 『삼국사기』 옛 판본『삼국사기』 옛 판본

    노래 속 장인, 기록 속 맞수

    『삼국사기』의 무왕은 41년 동안 신라와 끊임없이 싸운 왕이에요. 602년 아막산성(모산성) 싸움(31화)에서는 좌평 해수의 4만 군사가 크게 졌지만, 611년 가잠성을 백 일 만에 빼앗고 624년에는 여섯 성을 차지했어요. 627년 웅진에 군사를 모으자 진평왕이 당에 급함을 알렸고, 당 태종은 ‘지난 원한을 잊고 싸움을 그치라’는 글을 보냈어요. 『삼국사기』는 무왕이 ‘겉으로는 따르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여전히 원수로 여겼다’고 적었어요.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 ·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평왕
  4. 부여 궁남지부여 궁남지 · 『삼국사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고쳐 꾸민 연못

    왕흥사 · 궁남지 · 대왕포

    『삼국사기』는 634년 2월 물가에 선 왕흥사가 완성되어 왕이 늘 배를 타고 가 향을 피웠고, 3월 궁궐 남쪽에 못을 파 20여 리 밖에서 물을 끌어오고 버드나무와 신선의 섬(방장선산)을 꾸몄다고 적었어요. 오늘날 부여의 궁남지는 이 기록을 바탕으로 1960년대에 고쳐 꾸민 연못이에요. 636년 3월 무왕이 거문고를 타며 노래한 곳은 ‘대왕포’라 불렸어요. 한편 『삼국사기』는 법왕이 600년에 왕흥사를 짓기 시작했다고 적었는데, 2007년 왕흥사 터의 나무 탑 자리에서 나온 사리 그릇에는 ‘정유년(577) 2월 15일 백제 왕 창(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찰(刹)을 세웠다’는 글이 있어요. 그래서 탑이 위덕왕 때 먼저 섰다고 보거나, 절이 처음 세워진 때를 위덕왕 때로 보기도 해요.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 ·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
  5. 익산 미륵사지 석탑(2019년)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 2019년 수리를 마친 서쪽 돌탑

    미륵사와 서쪽 돌탑

    익산 미륵산(옛 용화산) 아래의 미륵사 터를 1980~1994년에 발굴해 보니, 『삼국유사』가 ‘전각과 탑과 회랑을 세 곳에 세웠다’고 한 그대로 가운데의 나무 탑과 동·서의 돌탑이 따로 구역을 이룬 ‘3원’ 구조였어요. 서쪽 돌탑은 남아 있는 우리나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큰 탑(국보)으로, 9층이었을 것으로 보지만 6층까지만 남았어요. 1915년 무너진 쪽을 시멘트로 덧발랐던 탑을 2001년부터 해체해 고쳐 쌓아, 2019년에 20년 가까운 수리를 마쳤어요. 2015년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세계유산이 되었어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국가유산청
  6. 미륵사지 석탑 금제 사리봉영기금제 사리봉영기 · 국립익산박물관

    금판 한 장 — 사리봉영기

    2009년 1월 14일, 서쪽 돌탑 1층 한가운데 돌기둥 윗면의 사리공(한 변 25센티미터쯤)에서 금으로 만든 사리 항아리, 금판(가로 15.3, 세로 10.3센티미터)과 500점 넘는 공양품이 나왔어요. 금판에는 ‘우리 백제 왕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서 재물을 내어 절을 세우고, 기해년(639) 정월 29일 사리를 받들어 맞이하며 대왕의 장수를 빌었다고 새겨져 있었어요. 그래서 선화 공주 이야기는 뒤에 만들어진 설화라는 견해, 무왕에게 왕비가 여럿이어서 선화 공주가 먼저 왕비였을 수 있다는 견해, 금판은 세 구역 가운데 서쪽 탑만의 이야기라는 견해가 함께 나왔어요. 아직 어느 쪽으로도 결론이 나지 않았어요.

    익산 미륵사지 석탑 사리봉영기 · 국립익산박물관
  7. 익산 왕궁리 유적익산 왕궁리 유적 · 궁궐 터에 선 오층석탑(국보)

    익산 — 왕궁리와 쌍릉, 그리고 상상으로 그린 것

    익산 왕궁리에는 동서 약 240미터, 남북 약 490미터의 담장 안에 정원·공방·화장실까지 갖춘 7세기 궁궐 터가 있어, 무왕이 익산을 또 하나의 도읍처럼 썼다는 견해(천도설·별도설 등)가 있어요. 『고려사』 지리지는 익산의 쌍릉을 ‘후조선 무강왕과 왕비의 능’이라 하면서, 민간에서는 ‘말통대왕릉’이라 부르고 백제 무왕(어릴 때 이름 서동)의 능이라고도 한다고 적었고, 2018년 대왕릉에서 나온 뼈는 620~659년 무렵에 죽은 나이 든 남성의 것으로 밝혀져 무왕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가 힘을 얻었어요. 이 화의 그림자극 속 사람들의 모습과 말, 왕흥사·대왕포·미륵사의 모습, 사리를 모시는 왕후의 모습, 2009년의 조사원들은 상상으로 그린 거예요.

    『고려사』 지리지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2018)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번 화의 열쇠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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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 신라라는 이름

이야기는 100년쯤 거슬러 올라가 500년의 신라로 간다. 예순넷에 왕위에 오른 몸집 큰 임금은 나라 이름을 ‘신라’로 정하고, 동해 건너 끝내 따르지 않던 섬나라로는 나무 사자를 실은 배들이 떠난다.

사진 출처

이 웹툰의 삽화는 모두 새로 그린 것이며, 등장인물의 이름과 대사는 역사적 사실과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상상해 재구성한 것입니다. 연대와 해석은 학계의 일반적인 설명을 따랐고, 의견이 갈리는 부분은 역사 노트에 밝혀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