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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화사비로, 그리고 관산성
제26화

사비로, 그리고 관산성

백제 성왕 · 523년 ~ 55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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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마다 바람·모닥불·강물 소리가 바뀌고, 이야기 흐름을 따라 음악도 달라져요.
지난 이야기

1971년 공주 송산리에서 드러난 벽돌무덤의 돌판에는 ‘백제 사마왕’, 곧 무령왕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501년 왕위에 오른 무령왕은 백가의 난을 누르고 고구려를 여러 번 물리쳐, 한성을 잃고 흔들리던 백제를 다시 일으켰다. 523년 왕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 명농이 왕위에 올라, 아버지를 연꽃무늬 벽돌무덤에 모셨다.

등장인물

성왕백제의 왕 · 이름은 명농
무령왕의 아들
창성왕의 맏아들
뒷날의 위덕왕
왕녀성왕의 딸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무령왕성왕의 아버지
(회상)
김무력신라 신주의 군주(軍主, 주를 맡은 장군)
금관국 마지막 왕의 막내아들
도도김무력의 비장
삼년산군의 고간

554년 7월, 한밤의 산길.

백제의 왕이 겨우 쉰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어둠 속을 서둘러 가고 있었다.

왕날이 밝기 전에 닿아야 한다.

이 왕은 누구이고, 왜 이 밤길에 나섰을까.

이야기는 서른한 해 전,
백제의 도읍 웅진에서 시작된다.

523년 5월, 무령왕이 세상을 떠나고 아들 명농이 왕위에 올랐다.

성왕(명농)무령왕의 아들 · 백제의 새 왕
성왕아버님이 다시 일으킨 나라다.
이제 더 크게 키우겠다.

『삼국사기』는 그가 지혜와 식견이 뛰어나고 일을 결단성 있게 처리해, 나라 사람들이 ‘성왕’이라 불렀다고 적었다.

왕이 된 지 일곱 해째인 529년 10월, 고구려 안장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와 북쪽 변경의 혈성을 빼앗았다.

좌평 연모가 3만 군사로 맞섰으나
오곡의 들에서 져, 2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475년 한성을 잃고 급히 옮겨 온 도읍 웅진은, 산과 강 사이의 좁은 땅이었다.

신하산과 강이 막아 주니, 지키기엔 그만이옵니다.
성왕그러나 너무 좁소.
백성도, 배도 넉넉히 들어설 수가 없소.

왕은 새 도읍을 꿈꾸었다. 금강을 따라 내려간 곳의 너른 들, 사비였다.

성왕북쪽은 산이 막아 주고, 강이 감싸 흐른다.
이 강을 따라 배가 바다로 나간다. 양나라로, 왜로!

사비. 금강이 낮은 산을 감싸 돌고, 그 앞으로 너른 들이 펼쳐진 땅이었다.

부소산에는 성이, 그 아래에는 궁궐과 절과 큰길이 하나둘 들어섰다.

일꾼한 켜 더! 단단히 다져라!

538년 봄, 백제는 마침내 도읍을 사비로 옮겼다.

아이엄마, 저기가 새 도읍이야?
엄마그래, 저기란다.
南扶餘
성왕오늘부터 나라 이름을 ‘남부여’라 하겠다!

백제 왕실은 스스로 부여에서 나왔다고 여겼다. 새 도읍에서, 왕은 나라 이름을 ‘남부여’라 했다.

사비는 처음부터 계획을 세워 지은 도읍이었다. 도읍의 북쪽과 동쪽은 긴 흙 성벽, 나성이 감쌌다.

541년, 성왕은 바다 건너 양나라에 『시경』 박사와 『열반경』 같은 불경의 풀이, 장인과 화가를 보내 달라고 청했다.

성왕먼 바닷길에 수고 많으셨소!
양나라 학자배움을 이토록 아끼시는 왕이시라니요.

양나라는 그 청을 들어주었다.

548년 정월, 고구려가 예와 함께 백제의 독산성을 치자 성왕은 동맹인 신라에 구원을 청했다. 신라 장군 주진이 갑옷 입은 군사 3천을 이끌고 밤낮으로 달려와, 고구려군을 크게 깨뜨렸다.

백제 군사신라군이 왔다!
주진신라의 장군

550년 정월, 백제는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았다. 3월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쳤다.

그러자 신라가, 두 나라 군사가 지친 틈을 타
두 성을 모두 차지했다.

551년, 백제와 신라는 함께 고구려를 쳤다.

고구려백제신라가야서해동해한강금강죽령사비백제의 도읍서라벌신라의 도읍한성백제가 되찾은 한강 하류한강 상류신라가 차지한 죽령 너머 10군나라의 경계와 위치는 대략이며학자마다 의견이 다르다

백제는 한강 하류의 옛 땅을, 신라는 죽령 너머 한강 상류의 열 군을 차지했다.

백제군은 마침내 한강 가의 옛 도읍, 한성 땅에 들어섰다.

475년 개로왕이 목숨을 잃으며 빼앗긴 그 땅을, 일흔여섯 해 만에 되찾은 것이다.

성왕아버님… 한성을 되찾았습니다.
무령왕…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성왕의 아버지 무령왕은 일찍이 양나라에 ‘백제가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는 글을 올린 왕이었다.

553년 7월, 신라가 백제의 동북쪽 변경 — 한강 하류의 땅을 빼앗고, 그곳에 ‘신주’를 두었다.

김무력신주의 군주 · 금관국 마지막 왕의 막내아들
김무력오늘부터 이 땅은 신라의 신주다!

사비의 궁궐에 급한 소식이 닿았다. 왕의 곁에는 맏아들 창이 있었다.

전령신라가… 한강의 성들을 빼앗았다 하옵니다!
창신라가 배신했습니다!
당장 군사를 내소서!
성왕……

120년 가까이 이어진 두 나라의 동맹이, 이렇게 깨졌다.

553년 10월, 성왕의 딸이 신라로 시집갔다.

왕녀아버님…
성왕…몸 성히 지내거라.

신라가 백제의 한강 땅을 빼앗은 지 석 달 뒤였다. 왕이 왜 딸을 보냈는지는, 어느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다.

신라의 기록은, 그해 10월 진흥왕이 백제 왕의 딸을 ‘작은 왕비(소비)’로 맞았다고 적었다.

554년 7월, 백제는 가야와 함께 신라의 관산성을 쳤다.

창관산성을 쳐라!
가야 군사백제와 함께 싸운 ‘가량’

신라의 군주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가 맞서 싸웠으나, 싸움은 신라에 불리했다.

소식을 들은 신주의 군주 김무력이, 신주의 군사를 이끌고 관산성으로 달려왔다.

김무력관산성을 구하라! 서둘러라!
도도삼년산군의 고간 · 김무력의 비장
백제신라한강금강웅진삼년산군 (보은)사비백제의 도읍신주553년 신라가 둔 주 · 군주 김무력관산성지금의 충북 옥천 · 그 곁의 구천(추정)

관산성은 사비에서 금강을 거슬러 동쪽으로 올라간 곳에 있는, 신라의 성이었다.

싸움은 처음에는 백제 쪽으로 기우는 듯했다.

그리고, 554년 7월의 그 밤.

백제 장수전하, 저 앞 개울이 구천입니다.
성왕창이 기다린다. 서두르자.

『삼국사기』는 왕이 신라를 치려고 보병과 기병 쉰 명만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다고 적었다.

개울 건너 어둠 속에는, 신라의 군사들이 숨어 있었다.

신라 군사횃불이다…
도도…쉰 남짓. 기다려라.

신라의 복병이 일어났다.

백제의 기록은, 왕의 마지막을 이렇게만 적었다.

왕은 어지러이 싸우는 군사들에게
해를 입어 세상을 떠났다.

為亂兵所害薨 —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32년(554)

날이 밝았다. 개울가에는 주인 잃은 말들만 남아 서성였다.

성왕날이 밝기 전에 닿아야 한다.

신라의 기록은, 김무력의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백제 왕을 죽였다고 적었다.

왕을 잃은 백제군은 무너졌다.

신라의 기록에 따르면, 이 싸움에서 백제의 좌평 네 사람과 군사 2만 9,6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비의 성문 밖에서,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는 이들을 기다렸다.

아이아빠는 언제 와?

신라의 기록은 이렇게 덧붙였다. ‘말 한 마리도 돌아가지 못했다.’

성왕의 맏아들 창이 왕위에 올랐다. 뒷날 ‘위덕왕’이라 불리는 왕이다.

창아버님…

서라벌로 시집간 왕녀가 아버지의 소식을 어떻게 들었는지는, 어떤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다.

창아버님이 세우신 도읍입니다.
성왕…이제 더 크게 키우겠다.

성왕이 세운 도읍 사비는, 그 뒤 120여 년 동안 백제의 서울이었다.

되찾은 한강은 다시 잃었지만,
강가의 도읍은 남았다.

제26화 끝

역사 노트

이야기 속 장면은 이런 기록과 유적을 바탕으로 그렸어요.

  1. 부여 백마강부여를 휘감아 흐르는 백마강(금강)

    사비 천도와 ‘남부여’

    『삼국사기』는 성왕 16년(538) 봄에 도읍을 사비(소부리라고도 해요)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라 했다고 적었어요. 475년 급히 옮겨 간 웅진은 산과 강 사이의 좁은 땅이었고, 사비는 금강 뱃길로 바다와 이어진 너른 들이었어요. 성왕이 왕이 된 초기부터 천도를 계획했다고 보는 견해가 많고, 부소산에서 양나라 연호 ‘대통’(527~529)이 찍힌 기와가 나와 그 무렵부터 공사를 시작했다고 보기도 해요. 백제 왕실은 부여에서 나왔다고 여겨 성을 ‘부여’라 했어요.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 『삼국유사』 남부여·전백제
  2.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국보)

    계획도시 사비 — 부소산성·나성·정림사지

    사비는 해발 106미터의 낮은 산인 부소산에 산성을 쌓고, 그 남쪽 기슭(관북리 유적)에 왕궁을 둔 계획도시였어요. 도읍의 북쪽과 동쪽은 길이 6.3킬로미터쯤 되는 흙 성벽 나성이 감쌌고, 서쪽과 남쪽은 금강(백마강)이 휘감아 흘러요. 도읍 한가운데의 정림사지는 성왕의 천도 뒤에 세웠다는 견해와 7세기에 세웠다는 견해가 있고, 지금 남은 오층석탑은 7세기 무렵의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아요. 이 유적들은 2015년 공주·익산의 유적과 함께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세계유산이 되었어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서울 몽촌토성몽촌토성 · 한성 백제의 성 (서울 송파구)

    551년의 한강, 553년의 신주

    『삼국사기』 거칠부 열전은 551년 백제 사람들이 먼저 ‘평양’을 깨뜨리자, 거칠부와 구진 등 여덟 장군이 기세를 타 죽령 바깥 고현 안쪽의 열 군을 차지했다고 적었어요. 이 ‘평양’은 고구려의 도읍이 아니라 한강 유역(지금의 서울 일대)으로 보는 견해가 많아요. 『일본서기』(흠명기 12년)는 이해 성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한성 땅을 얻고 평양까지 쳐서 옛 땅 여섯 군을 되찾았다고 적었는데, 『삼국사기』에는 백제가 한성을 되찾았다는 말이 따로 없어요. 그런데 553년 7월, 신라가 백제의 동북쪽 변경을 빼앗아 신주를 두고 김무력을 군주로 삼았어요. 석 달 뒤 10월에 성왕의 딸이 신라로 시집갔는데(신라본기는 진흥왕이 ‘작은 왕비’로 맞았다고 해요), 그 까닭은 기록에 없어요.

    『삼국사기』 열전 거칠부 · 백제본기 · 신라본기
  4. 보은 삼년산성보은 삼년산성 · 도도가 속한 삼년산군의 신라 산성

    관산성 싸움 — 두 나라의 기록

    백제본기는 554년 7월 왕이 신라를 치려고 보병과 기병 50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다가 신라 복병을 만나 죽었다고만 적었어요. 신라본기는 백제 왕이 가량(가야)과 함께 관산성을 치자 각간 우덕·이찬 탐지가 맞서다 밀렸고, 신주 군주 김무력이 달려와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왕을 죽였으며, 백제의 좌평 4명과 군사 2만 9,600명을 베어 ‘말 한 마리도 돌아가지 못했다’고 적었어요. 같은 『삼국사기』의 김유신 열전에는 그의 할아버지 무력이 백제 왕과 장수 넷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을 베었다고 되어 있어 숫자가 달라요. 관산성은 지금의 충북 옥천으로 봐요.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5. 『일본서기』가 전하는 이야기

    일본의 역사책 『일본서기』(흠명기 15년 조)는 왕자 여창(창)이 신라를 치러 나가 오래 싸우자, 지친 아들을 걱정한 성명왕(성왕)이 몸소 위로하러 가다가 신라군에 길이 끊겨 좌지촌의 말 기르는 노비 ‘고도’에게 죽었다고 전해요. 고도는 『삼국사기』의 고간 도도와 같은 사람으로 보는 견해가 많은데, 신라 기록은 공을 세운 지방 유력자로, 백제 쪽 이야기를 옮긴 『일본서기』는 노비로 낮춰 적었다는 풀이가 있어요. 왜의 입장이 섞인 책이라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이 화에서 창이 앞장서 싸우고 성왕이 아들의 진영으로 가는 장면과 대사는 이 이야기를 빌려 그렸어요.

    『일본서기』 흠명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6. 성왕과 왜의 불교

    『일본서기』는 552년 10월 성왕이 달솔 노리사치계를 보내 금동 석가불 한 구와 깃발·일산, 불경 몇 권을 왜 조정에 전했다고 적었어요. 일본의 다른 기록에는 이 일이 538년(무오년)으로 되어 있어, 일본에 불교가 전해진 해를 538년으로 보는 견해도 많아요. 성왕은 541년 양나라에 『열반경』 같은 불경의 풀이와 장인·화가를 청한 왕이기도 해서, 백제는 중국에서 배운 것을 다시 바다 건너 왜에 전하는 다리 노릇을 했어요.

    『일본서기』 흠명기 ·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7. 백제 금동대향로백제 금동대향로 (국보) · 국립부여박물관

    아들이 세운 절 — 능산리 절터

    부여 능산리 왕릉 곁 절터에서 1995년 나온 돌 사리감(국보)에는 ‘백제 창왕 13년 정해년(567)에 누이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했다’는 글이 새겨져 있어요. 창왕은 바로 성왕의 아들 위덕왕이라, 이 절을 아버지 성왕의 명복을 빌려고 세운 것으로 봐요. 1993년 이 절터에서는 백제 금동대향로가 나왔어요. 이 화의 신하·일꾼·아이들, 성왕과 창과 왕녀의 대사, 그림 속 큰 절과 나무 탑, 왕녀가 서라벌에서 서쪽을 바라보는 장면은 상상으로 그린 거예요.

    부여 능산리 사지 석조 사리감 · 국립부여박물관

이번 화의 열쇠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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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 서동의 노래

마를 캐어 팔던 가난한 소년 서동이, 신라 서라벌의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 주며 노래 한 자락을 가르친다. 『삼국유사』가 전하는 그 노래는, 소년을 어디로 데려갈까.

사진 출처

이 웹툰의 삽화는 모두 새로 그린 것이며, 등장인물의 이름과 대사는 역사적 사실과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상상해 재구성한 것입니다. 연대와 해석은 학계의 일반적인 설명을 따랐고, 의견이 갈리는 부분은 역사 노트에 밝혀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