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신왕의 맹세
장면마다 바람·모닥불·강물 소리가 바뀌고, 이야기 흐름을 따라 음악도 달라져요.
열여덟 살에 왕이 된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담덕)은 392년 백제의 성 10여 곳과 바다에 둘러싸인 관미성을 빼앗았다. 숙부 진사왕의 뒤를 이은 백제의 아신왕은 외삼촌 진무에게 그 치욕을 씻어 달라고 했지만, 393년 관미성 공격은 군량이 끊겨 물러났고 394년과 395년에도 잇달아 졌다. 395년 겨울, 몸소 군사를 이끌고 나선 아신왕은 청목령에서 큰 눈을 만나 돌아서야 했다.
등장인물
관미성을 되찾으려 했다
몸소 수군을 이끈다
아신왕의 외삼촌
백제의 태자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395년 겨울. 북쪽의 왕과 남쪽의 왕은 같은 눈을 맞고 있었다.
이듬해 396년, 두 나라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졌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이 싸움이 실려 있지 않다.
고구려가 세운 광개토대왕릉비만이, 이긴 쪽의 목소리로 그해의 일을 전한다.
비석은 백제를 ‘백잔(百殘)’이라 낮춰 부르며, 그해의 일을 이렇게 적었다.
영락 6년 병신년,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잔국(백제)을 토벌하였다.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 광개토대왕릉비
396년, 광개토대왕은 몸소 수군을 이끌고 남쪽으로 나섰다.
소식은 곧 백제의 도읍 한성에 닿았다.
비석에는 이때 고구려가 빼앗은 백제의 성 이름이 줄줄이 새겨져 있다.
고구려군은 백제의 성을 하나하나 빼앗으며, 도성으로 다가갔다.
고구려군이 도성 가까이 이르자, 백제군이 성을 나와 맞서 싸웠다.
광개토대왕은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넜다.
비석의 ‘아리수’는 한강의 옛 이름으로 본다.
백제군은 성안으로 물러났고, 고구려군은 곧바로 도성을 에워쌌다.
에워싸인 아신왕은 궁지에 몰렸다.
그리고 어느 날,
아신왕은 고구려 왕 앞으로 나아갔다.
아신왕은 남녀 1천 명과 가는 베 1천 필을 바쳤다.
그리고 고구려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스스로 맹세했다.
노객(奴客)은 고구려 왕을 받들어 섬기는 신하라는 뜻이다.
광개토대왕은 아신왕의 아우와 대신 열 명을 데리고, 도읍으로 돌아갔다.
비석은 이 싸움으로 고구려가 성 58곳과 마을 700곳을 얻었다고 적었다.
397년 5월, 아신왕은 왜와 우호를 맺고, 태자 전지를 볼모로 보냈다.
전지가 백제로 돌아오는 것은 여덟 해 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의 일이다.
397년 7월, 아신왕은 한수 남쪽에서 군사를 크게 사열했다.
이듬해 2월, 진무는 나라의 군사를 맡는 병관좌평이 되었다.
398년 8월, 아신왕은 고구려를 치려고
몸소 군사를 이끌고 나섰다.
왕의 군사가 한산 북책에 이른 그날 밤, 큰 별이 진영에 떨어지며 소리가 났다.
왕은 이를 몹시 꺼려, 군사를 거두었다.
399년 8월, 아신왕은 또다시 고구려를 치려고 군사와 말을 크게 거두었다.
부역에 시달린 백성들이 많이 신라로 달아났다.
백제 땅의 집과 사람이 줄어들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399년의 일을 이렇게 적었다.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손을 잡았다.
九年己亥 百殘違誓 與倭和通 — 광개토대왕릉비
그해 광개토대왕은 남쪽 평양으로 내려왔다.
그때 신라 왕이 보낸 사신이 달려왔다.
신라 사신은 자기 임금을 ‘노객’이라 낮추어 불렀다.
태왕은 사신을 돌려보내며, 은밀한 계책을 일러 주었다.
북쪽의 왕과 남쪽의 왕. 한 사람은 맹세를 받았고, 한 사람은 그 맹세를 지키지 않았다.
무릎 꿇고 한 맹세는, 그렇게 깨졌다.
이듬해 400년, 광개토대왕은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하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