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를 구하라
장면마다 바람·모닥불·강물 소리가 바뀌고, 이야기 흐름을 따라 음악도 달라져요.
396년,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제의 도성을 에워쌌고, 궁지에 몰린 백제의 아신왕은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아신왕은 이듬해 태자 전지를 왜에 볼모로 보내 왜와 손을 잡았다. 399년, 평양에 내려온 태왕 앞에 신라의 사신이 달려와 ‘왜인이 국경에 가득하다’며 도움을 청하자, 태왕은 사신에게 은밀한 계책을 일러 돌려보냈다.
등장인물
신라에 군대를 보낸다
고구려에 와 있는 볼모
비석은 ‘매금’이라 불렀다
고구려에 온 사신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아직 어리다
왜와 손잡았다.
내줄 수는 없다.
399년, 평양. 신라의 사신은 태왕이 일러 준 계책을 품고 남쪽으로 말을 달렸다.
그 무렵 고구려에는, 신라에서 온 볼모가 한 사람 있었다.
가득하다니.
392년 정월.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오자, 내물왕은 고구려가 강성하다 하여 실성을 볼모로 보냈다.
그대가 가 주어야겠다.
무사하실까.
그 뒤로 일곱 해. 실성은 아직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사신은 서라벌로 돌아와, 태왕이 일러 준 계책을 왕에게 전했다.
하리다.
그 계책이 무엇이었는지, 비석은 적지 않았다.
이듬해 400년. 광개토대왕릉비는 이렇게 적었다.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어
신라를 구하게 하였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 광개토대왕릉비
신라를 구하라!
받들겠습니다!
비석은 이번에는 태왕이 ‘몸소 이끌었다’고 하지 않고, 군대를 ‘보냈다’고 적었다.
보병과 기병 5만이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신라로 간다.
비석에 따르면, 고구려군은 남거성에서 신라성으로 나아갔다. 신라성은 신라의 도읍이다.
신라의 도읍 신라성. 그 안에 왜가 가득했다.
아직인가.
저 소리…!
소리다…!
고구려군이 왔다!
고구려군이 신라성에 이르렀다.
관군이 막 이르자, 왜적이 물러갔다.
우리가 살았다!
비석은 고구려군을 ‘관군’, 왜를 ‘왜적’이라 불렀다.
고구려군은 왜의 뒤를 급히 쫓아,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렀다.
끝까지 쫓아라!
종발성은 곧 항복해 따랐다.
임나가라는 지금의 김해에 있던 금관가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왜구는 크게 무너졌다.
달아난다!
그런데 비석의 이 대목은, 여기서부터 글자가 많이 닳아 없어졌다.
남은 글자 ‘安羅人戍兵(안라인수병)’도 ‘안라의 수비병’, ‘신라 사람을 두어 지키게 했다’처럼 읽는 법이 갈린다.
지워진 글자들 사이로, 신라 왕을 ‘매금(寐錦)’이라 부른 문장이 남아 있다.
예전에는 신라 매금이 몸소 와서
아뢴 적이 없었는데…
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 — 광개토대왕릉비
이어지는 글자도 군데군데 지워졌지만, 광개토대왕 때에 이르러 신라 매금이 고구려에 조공했다는 뜻으로 읽힌다.
왜가 물러간 신라성.
신라를 살렸소.
아뢰어야겠소.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해 8월, 동쪽 하늘에 꼬리별이 나타났다.
아는 게로구나.
겨울 10월에는 왕이 늘 타던 말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었다고 한다.
401년 7월, 실성은 아홉 해 만에 신라로 돌아가게 되었다.
고구려를 보았으니,
잘 지키라.
잊지 않겠습니다.
실성은 남쪽으로, 고향으로 말을 몰았다.
실성은 아홉 해 만에 서라벌로 돌아왔다.
그대로구나.
고생 많았소.
『삼국사기』는 실성이 자기를 볼모로 보낸 내물왕을 원망했다고 적었다.
402년 2월, 내물왕이 세상을 떠났다.
왕의 아들들이 아직 어려, 나라 사람들은 실성을 왕으로 세웠다.
이제 신라의 왕이다.
…네가 가 주어야겠다.
402년 3월, 실성왕은 왜와 화친을 맺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볼모로 보냈다.
『삼국사기』는, 내물왕을 원망하던 실성이 왜의 청을 거절하지 않고 미사흔을 보냈다고 적었다.
미사흔이 신라로 돌아오는 것은, 열여섯 해 뒤의 일이다.
412년, 실성왕은 내물왕의 또 다른 아들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볼모로 떠났던 사람이,
볼모를 보내는 왕이 되었다.
1946년 5월, 경주의 한 신라 무덤.
청동 그릇이 있다!
‘을묘년(415년)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 호우 십’. 광개토대왕의 이름을 새긴, 고구려의 청동 그릇이었다.
이 그릇이 어떻게 신라로 와서 무덤에 묻혔는지는 알 수 없다.
400년, 고구려의 군대는 신라를 구했다.
그 뒤로 한동안 신라는 고구려의 큰 힘 아래 있었고, 왕자들은 볼모가 되어 길을 떠났다.
태왕의 이름을 새긴 그릇은,
그렇게 신라 땅에 남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