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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화살수의 물결
제34화

살수의 물결

고구려와 수의 전쟁 · 6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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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마다 바람·모닥불·강물 소리가 바뀌고, 이야기 흐름을 따라 음악도 달라져요.
지난 이야기

지난 화에서는 신라의 첫 여왕 선덕여왕을 만났다. 여왕은 642년 대야성을 잃고 당 황제의 업신여김을 받으면서도 황룡사 9층 탑을 세웠고, 647년 비담의 난 한가운데서 세상을 떠났다. 그 곁에는 두 기둥 김춘추와 김유신이 있었다.

등장인물

을지문덕고구려의 대신.
꾀가 많고 글을 잘 지었다
영양왕고구려의 왕.
수나라에 맞선다
수 양제수나라의 황제.
고구려를 세 번 친다
우중문수나라 장수.
을지문덕을 놓친다
우문술수나라의 장수.
평양까지 쳐들어온다
나루을지문덕을 따르는
젊은 병사 · 상상 인물

이번 이야기는 시간을 거슬러, 선덕여왕 때보다 한 세대쯤 앞선 고구려로 간다.

589년, 수나라가 오랫동안 남북으로 갈라져 있던 중국을 하나로 합쳤다.

그 큰 나라가 동쪽의 고구려를
바라보고 있었다.

598년 2월, 고구려의 영양왕은 말갈 군사 1만여 명을 이끌고 수나라의 요서 땅을 쳤다.

영양왕고구려의 왕
영양왕요서로 간다!
서쪽으로!

수나라의 영주총관 위충이 이를 막아 물리쳤다.

수 문제는 크게 노해, 아들 한왕 양량 등에게 물과 뭍의 군사 30만을 주어 고구려를 치게 했다.

장마에 군량 길이 끊기고 돌림병이 돌았다. 바닷길로 간 배들도 풍랑에 많이 가라앉았다.

수나라 군사수레가 빠졌다!
밀어라!
양식이…
다 떨어졌대.

9월, 수나라 군사는 돌아갔다. 죽은 자가 열에 여덟아홉이었다.

영양왕도 두려워 사신을 보내 사죄하며, 스스로를 ‘요동 분토신(요동의 썩은 흙 같은 신하)’이라 낮추었다. 문제는 군사를 거두고 예전처럼 대했다.

9년 뒤, 문제의 아들 양제가
북쪽 초원으로 길을 나섰다.

607년, 양제가 돌궐 계민가한의 장막에 갔을 때, 마침 고구려 사신이 그곳에 와 있었다.

수 양제수나라 황제계민가한돌궐의 가한(임금)고구려 사신
황제의 신하 우홍너희 왕에게 일러라.
어서 와서 조회하라.
오지 않으면,
계민을 거느리고
너희 땅으로 가리라!

계민은 사신을 감히 숨기지 못하고, 함께 황제 앞에 나아갔다.

사신이 이 말을 전하자 영양왕은 두려워했다. 그러나 왕은 수나라에 가지 않았다.

영양왕수나라가…
오겠구나.
을지문덕그렇다면 미리
막을 채비를
하셔야 합니다.
을지문덕고구려의 신하

『삼국사기』는 을지문덕이 침착하고 굳세며 꾀가 많고, 글도 지을 줄 알았다고 적었다. 그의 집안 내력은 알 수 없다고 했다.

611년, 양제는 고구려를 치겠다고 선포하고 온 나라의 군사를 탁군(지금의 베이징 부근)에 모았다.

612년 정월, 다시 조서가 내려졌다.

고구려의 하찮은 무리가
어리석고 공손하지 않구나.

高句麗小醜 迷昏不恭 — 『삼국사기』 영양왕 23년

『삼국사기』는 이때 모인 군사가 113만 3,800명으로 200만이라 일컬었고, 군량을 나르는 사람은 그 두 배였다고 적었다.

수 양제모두 평양에
모이라!

하루에 한 군씩 40리 간격으로 떠나, 다 떠나는 데 40일이 걸렸다. 깃발이 960리에 뻗쳤다.

요수(요하)압록수(압록강)살수(지금의 청천강)패수(대동강)고구려수나라발해서해요동성평양성양제의 본대← 탁군아홉 군 30만 5천내호아의 수군길과 자리는 대략이며살수는 청천강으로 본다

양제의 본대는 요동성으로, 아홉 군은 압록수를 건너 평양으로, 수군은 바닷길로 평양을 향했다.

수나라 군사가 요수(지금의 랴오허)에 이르렀다. 고구려군은 강을 막고 지켰다.

고구려 장수쏘아라!
수나라 군사다리가…
모자란다!

수나라가 놓은 부교 세 줄은, 건너편 기슭에 한 길 남짓 모자랐다.

이틀 만에 다리를 이은 수나라 군사에게 고구려군은 크게 졌고, 요동성이 에워싸였다. 양제는 ‘모든 일은 먼저 아뢰고 기다리라’고 명해 두었다.

고구려 장수항복하겠소!
항복하겠소!
수나라 장수어서 황제께
아뢰어라!

답이 올 무렵이면, 성은 다시 방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런 일이 두세 번 되풀이되었다.

양제는 장수들을 불러 크게 꾸짖었다.

수 양제벼슬과 집안을 믿고
나를 얕보는가!
그대들이 하는 짓을 보고,
목을 베러 왔다!

장수들은 모두 두려워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무렵, 내호아가 이끄는 수나라 수군이 바다를 건너 패수(대동강)로 들어왔다.

내호아수나라 수군의 장수
부총관 주법상다른 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셔야 합니다!
내호아기다릴 것
없다!
평양으로!

배가 수백 리에 이어졌다. 평양성 60리 앞에서 고구려군을 크게 깨뜨린 뒤였다.

내호아는 날랜 군사 수만을 골라, 곧장 평양성 아래로 밀고 들어왔다.

건무영양왕의 아우 · 뒷날의 영류왕
건무평양 땅을
밟게 두지 마라!

중국 기록에는, 이 싸움에서 영양왕의 아우 건무가 결사대 수백 명을 이끌고 싸웠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고구려 장수는 외성 안의 빈 절에 군사를 숨겨 두고, 나가 싸우다 일부러 진 척 물러났다.

수나라 군사성 안이다!
다 가져가라!
고구려 장수지금이다!

복병이 덮치자 내호아는 크게 져 겨우 목숨을 건졌다. 살아 돌아간 군사는 수천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요수를 건널 때 30만 5천 명이던 우문술·우중문 등의 아홉 군이 압록수 서쪽에 모였다.

우중문수나라 장수 · 우익위대장군우문술수나라 장수 · 좌익위대장군
우문술쌀과 조를 버리는 자는
목을 벤다!

군사마다 100일 치 양식에 갑옷과 창, 옷감과 천막까지 졌다. 한 사람의 짐이 3석이 넘었다.

짐을 이기지 못한 군사들은 천막 안에 몰래 구덩이를 파고, 쌀을 묻었다.

길을 반쯤 갔을 때, 양식은 벌써 바닥나 가고 있었다.

수나라 군사이걸 다 지고는
못 간다…
쉿! 들키면
목이 달아나.

영양왕은 을지문덕을 수나라 진영에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게 했다.

영양왕항복하는 척하고,
저들의 속을
보고 오시오.
을지문덕다녀오겠습니다.
나루을지문덕의 병사 · 상상 인물

실은 적의 형편을 살피려는 것이었다.

을지문덕은 압록수를 건너, 수나라 진영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루장군,
사방이 창입니다…
을지문덕고개를 들어라.
그리고 잘 보아 두어라.

우중문은 미리 황제의 밀지를 받아 두었다. ‘왕이나 을지문덕이 오거든 반드시 사로잡으라.’

우중문저자를
붙잡아라!
유사룡아니 되오! 항복하러
온 사람이오!
유사룡항복한 이들을 달래는 수나라 관리

유사룡이 굳이 말리자, 우중문은 을지문덕을 돌려보냈다.

우중문은 곧 뉘우치고, 사람을 보내 을지문덕을 다시 불렀다.

수나라 사람더 할 말이 있으니,
다시 오시오!
나루장군…
부릅니다.
을지문덕돌아보지 마라.

을지문덕은 돌아보지 않고 압록수를 건너 돌아갔다.

을지문덕을 놓친 두 장수는 마음이 불안했다.

우문술양식이 다했소.
돌아가야 하오.
우중문10만 군사로 작은 적
하나 못 깨뜨리고,
무슨 낯으로
황제를 뵙겠소!

황제가 우중문의 지휘를 따르라 했으므로, 우문술은 하는 수 없이 압록수를 건너 을지문덕을 뒤쫓았다.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사들이 굶주린 것을 보고, 지치게 하려고 싸울 때마다 달아났다.

나루장군, 또
물러납니까?
을지문덕저들은 굶주렸다.
이기게 해 주어라.

우문술의 군사는 하루에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모두 이겼다.

잇단 승리에 들뜬 수나라 군사는 살수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산에 진을 쳤다.

을지문덕은 우중문에게 시 한 수를 지어 보냈다.

神策究天文妙算窮地理戰勝功旣高知足願云止
나루싸움터에서…
시를 쓰십니까?
을지문덕칭찬하는 시다.

을지문덕이 우중문에게 보낸 시

신기한 꾀는 하늘의 이치를 다 알고
오묘한 셈은 땅의 이치를 꿰뚫었소.
싸워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함을 알고 그만두기를 바라오.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 『삼국사기』 열전 을지문덕

우중문만족함을 알고…
그만두라?

우중문은 답장을 보내, 을지문덕을 타일렀다.

을지문덕은 다시 사신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했다.

고구려 사신군사를 돌리시면,
우리 왕을 모시고
황제께 조회하러 가겠소.
우문술군사들은 지쳤고…
저 성은 험하다.

우문술은 이 말을 핑계 삼아 군사를 돌렸다.

수나라 군사는 네모난 진을 짜고 물러났다.

수나라 장수진을
흩뜨리지 마라!

고구려군이 사방에서 들이치자, 그들은 싸우면서 물러가야 했다.

612년 7월, 물러가던 수나라 군사가 살수에 이르렀다.

군사가 강을 반쯤 건넜을 때—

을지문덕지금이다!
쳐라!

고구려군이 뒤에서 수나라의 후군을 들이쳤다.

수나라 장수 신세웅이 싸우다 쓰러졌다. 여러 군이 한꺼번에 무너져, 막을 수가 없었다.

수나라 군사달아나라!

살아남은 군사들은 하루 낮 하룻밤을 달아나 압록수에 이르렀다. 450리 길이었다.

처음 요수를 건널 때, 아홉 군은 30만 5천 명이었다.

요동성까지 돌아온 사람은
2,700명이었다.

『삼국사기』 영양왕 23년

을지문덕만족함을 알고
그만두기를 바라오.
을지문덕그만둘 줄
알았더라면…
나루장군…
이겼습니다.

살수의 물결은, 다시 잔잔해졌다.

양제는 크게 노해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고,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다.

이 싸움에서 수나라가 얻은 것은, 요수 서쪽 고구려의 작은 성 무려라 하나뿐이었다.

수 양제30만 5천이…
2,700이라니!

613년, 양제는 다시 쳐들어와 요동성을 20여 일 밤낮으로 쳤다. 그런데 수나라 안에서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다.

고구려 군사…너무
조용하다.
고구려 장수속임수다.
나가지 마라!

양제는 한밤중에 몰래 군사를 돌렸다. 고구려군은 속임수인가 싶어, 이틀이 지나서야 뒤를 쫓았다.

614년, 양제는 세 번째로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수나라는 이미 곳곳이 어지러워, 불러 모은 군사들이 제때 오지 못했다.

바닷길로 온 내호아가 비사성에서 고구려군을 깨뜨리고 평양으로 향하려 하자, 영양왕은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고 수나라에서 달아나 온 곡사정을 붙잡아 보냈다.

양제는 기뻐하며 군사를 거두었다.

도읍으로 돌아간 양제는, 영양왕에게 들어와 조회하라고 다시 명했다.

수 양제어서 와서 조회하라.
영양왕…가지 않는다.

영양왕은 끝내 가지 않았다.

그 뒤 수나라 곳곳에서 반란이 그치지 않았다.

618년, 양제는 강도(지금의 양저우)에서 신하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고, 수나라는 무너졌다.

같은 해 가을, 고구려의 영양왕도 세상을 떠났다. 왕위는 이복동생 건무가 이었다.

을지문덕이 그 뒤 어떻게 살았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이렇게 적었다.

수나라의 대군을 거의 다 없앤 것은,
을지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다.

滅其軍幾盡者 文德一人之力也 — 『삼국사기』 열전 을지문덕

제34화 끝

역사 노트

이야기 속 장면은 이런 기록과 유적을 바탕으로 그렸어요.

  1. 수나라 무사 도용수나라 무사 도용 · 중국 허난 박물원

    113만 3,800명이라는 숫자

    『삼국사기』는 중국 기록을 따라, 612년 수나라 군사가 113만 3,800명이었고 200만이라 일컬었으며 군량을 나르는 사람은 그 두 배였다고 적었어요. 하루에 한 군씩 40일 동안 떠났고 깃발이 960리에 이어졌다고도 해요. 군량 나르는 사람까지 치면 300만이 넘는 셈이라, 실제 싸운 군사는 이보다 적었을 거라는 견해도 있고 기록대로 받아들이는 견해도 있어요. 그래도 『삼국사기』가 ‘가까운 옛날에 이처럼 성대한 출병은 없었다’고 적었을 만큼, 보기 드문 큰 원정이었어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2. 요동성

    요동성은 한나라의 양평성 자리로,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 랴오양 일대예요. 612년에는 성이 위태로울 때마다 항복하겠다고 하여 시간을 벌며 몇 달을 버텼고, 613년에는 흙을 채운 포대 100만여 개를 만들어 성벽만큼 높은 길을 쌓으려 하고 성보다 높은 여덟 바퀴 누거까지 만들어 총공격을 앞두었을 때, 수나라 안에서 양현감의 반란이 일어나 위기를 넘겼어요. 평안남도 순천의 고구려 무덤 ‘요동성총’ 벽화에는 ‘遼東城’이라는 글씨와 함께 이 성의 모습이 그려져 있어요. 요동성은 645년 당나라 군대에게 무너져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3. 평양 대동문평양 대동문 · 대동강 가의 평양성 문 (1635년에 다시 세움)

    평양 앞의 수군과 건무

    수나라 장수 내호아는 장강과 회수 일대의 수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패수(대동강)로 들어왔어요. 『삼국사기』는 그가 정예 수만으로 평양성 아래까지 왔다가 외성 안 빈 절에 숨은 복병에게 크게 져, 수천 명만 살아 돌아갔다고 적었어요. 복병을 이끈 장수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아요. 중국 기록에도 이 싸움 이야기가 있어요. 『수서』 내호아전은 수나라 군사가 성 안에서 노략질하느라 흩어지자 고구려 왕의 아우 건무(建武)가 결사대 500명을 모아 들이쳐 내호아가 물러났다고 했고, 『북사』는 왕의 아우 ‘건(建)’이 결사대 수백 명으로 싸움을 걸어왔다가 목이 베였다고 했어요. 둘 다 『삼국사기』에는 없는 이야기예요. 이름이 같아 흔히 이 사람을 618년 형의 뒤를 이은 영류왕(제35화)으로 보는데, 그렇다면 『북사』의 이 대목은 사실과 달라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 『수서』 · 『북사』
  4. 『삼국사기』 옛 판본『삼국사기』 옛 판본

    을지문덕의 시

    을지문덕이 우중문에게 보낸 시는 『삼국사기』 을지문덕 열전에 실려 전해요. 다섯 글자씩 네 줄로 된 짧은 시로, 우리 역사에 전하는 가장 오래된 한시 가운데 하나로 꼽혀요. 겉으로는 적장의 꾀를 한껏 추어올리지만, 마지막 줄 ‘만족함을 알고 그만두기를 바란다’에는 이제 물러가라는 비웃음이 담겼다고 풀이해요. 고려의 이규보는 이 시의 구법이 기이하고 예스러우며 굳센 기상이 있다고 높이 샀어요.

    『삼국사기』 열전 을지문덕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 살수는 어디일까

    살수는 고구려 때의 강 이름으로, 지금의 평안북도 청천강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에요. 『삼국사기』에 따르면 수나라 아홉 군은 살수를 건너 평양성 30리 앞까지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살수를 반쯤 건넜을 때 뒤에서 공격을 받았어요. 살아남은 군사들은 하루 낮 하룻밤에 450리를 달아나 압록수에 이르렀고, 요수를 건널 때 30만 5천이던 군사 가운데 요동성까지 돌아온 사람은 2,700명이었다고 해요. 이 싸움을 ‘살수대첩’이라고 불러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6. 을지문덕은 누구인가

    『삼국사기』 열전은 을지문덕의 집안 내력을 알 수 없다고 했어요. 조선 후기의 『해동명장전』은 그를 평양 석다산 사람이라 했지만 훨씬 뒤의 기록이라 확실하지 않고, ‘을지’를 선비족의 성 ‘울지(尉遲)’와 같은 것으로 보아 귀화한 집안 출신으로 보는 견해도 있어요. 김부식은 수나라 대군을 거의 다 없앤 것이 ‘을지문덕 한 사람의 힘’이라 했고, 1908년 신채호는 전기 『을지문덕』을 펴내 그를 나라를 지킨 영웅으로 널리 알렸어요. 이 화에서 그를 따르는 젊은 병사 나루는 상상으로 그린 인물이고, 607년 궁궐에 을지문덕이 함께 있던 장면, 건무가 말을 달려 나오는 모습, 살수 언덕 위의 을지문덕, 인물들이 나눈 말, 장막과 나룻배의 모습도 기록을 바탕으로 지어냈어요.

    『삼국사기』 열전 을지문덕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7. 수 양제「역대제왕도권」 속 수 양제 · 염립본이 그렸다고 전하는 그림

    수나라의 멸망

    수나라는 세 번의 고구려 원정과 대운하 같은 큰 공사로 백성의 힘을 다 써 버렸어요. 611년부터 원정 준비의 고된 부역에 시달린 백성들이 들고일어나기 시작했고, 613년에는 귀족 양현감까지 반란을 일으켰어요. 614년 세 번째 원정 때는 불러 모은 군사가 제때 오지 못했어요. 618년 양제는 강도(지금의 양저우)에서 신하들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그 반란을 이끈 우문화급은 살수에서 진 장수 우문술의 아들이었어요. 같은 해 이연이 당나라를 세웠어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 『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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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화 · 천리장성

수나라가 무너지고 당나라가 선 뒤, 고구려는 새 이웃과 화친하려 한다. 그러나 631년 당이 수나라 때의 ‘경관’을 허물자, 고구려는 서쪽 변경에 천 리에 이르는 장성을 쌓기 시작하고 — 칼 다섯 자루를 찬 감독 연개소문이 나타난다.

사진 출처

이 웹툰의 삽화는 모두 새로 그린 것이며, 등장인물의 이름과 대사는 역사적 사실과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상상해 재구성한 것입니다. 연대와 해석은 학계의 일반적인 설명을 따랐고, 의견이 갈리는 부분은 역사 노트에 밝혀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