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릉의 문이 열리다
장면마다 바람·모닥불·강물 소리가 바뀌고, 이야기 흐름을 따라 음악도 달라져요.
475년 9월, 고구려 장수왕의 군사 3만이 백제의 도읍 한성을 에워쌌다. 바둑 두는 스님 도림의 꾀에 넘어가 큰 공사로 나라 살림을 바닥낸 개로왕은 아들 문주를 남쪽으로 보내 구원을 청하게 했지만, 성은 무너지고 왕은 목숨을 잃었다. 신라 군사 1만을 얻어 돌아온 문주는 왕위에 올라, 그해 10월 남쪽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도읍을 옮겼다.
등장인물
이름은 사마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뒷날의 성왕
동성왕을 해친 신하
조사원 · 상상 인물
상상 인물
1971년 여름 장마철, 충청남도 공주 송산리.
옛 백제 무덤인 6호분 안으로 빗물이 스며들자, 무덤 뒤 언덕에 물길을 내는 공사가 벌어졌다.
진흙 속에서, 벽돌을 둥글게 쌓아 올린 아치가 드러났다.
꽃무늬가 찍혔어요!
공사는 멈췄고, 발굴단이 급히 꾸려졌다. 입구를 드러내던 날 밤, 장대비가 쏟아졌다.
무덤 안에서 주인 이름이
나온 곳은 아직 한 군데도 없어.
1971년 7월 8일 오후. 사람들은 막힌 입구 앞에 막걸리와 수박, 북어를 차려 놓고 먼저 제사를 올렸다.
막아 둔 벽돌 두 장을 들어내자, 틈새로 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
손전등 불빛 끝에, 머리에 쇠뿔이 달린 돌짐승 하나가 무덤길 한가운데를 지키고 서 있었다.
흙먼지를 털어 내자, 돌에 새긴 글자가 드러났다.
돌판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이야기는 1,470년 전,
바로 이 땅에서 시작된다.
475년 한성을 잃은 백제는, 남쪽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다.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된 송산리 언덕도, 바로 이 웅진에 있다.
501년 11월, 사냥을 나갔다가 큰 눈에 막혀 마포촌에 묵던 동성왕이 자객의 칼에 맞았다.
자객을 보낸 이는 신하 백가였다. 왕은 12월에 끝내 세상을 떠났다.
501년 12월, 사마가 왕위에 올랐다. 뒷날 ‘무령왕’이라 불리는 왕이다.
『삼국사기』는 그가 키가 여덟 자에 눈매가 그림 같고, 어질고 너그러워 백성이 따랐다고 적었다.
이듬해 정월, 백가가 가림성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몸소 군사를 이끌고 우두성까지 나아가, 한솔 해명에게 가림성을 치게 했다.
백가는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했다.
왕은 백가를 처형했다.
506년, 큰 역병이 돌고 봄부터 석 달 동안 비가 오지 않아 냇물과 못이 말랐다.
510년, 왕은 둑을 튼튼히 쌓게 하고, 떠돌며 놀고먹던 사람들을 몰아 농사로 돌아가게 했다.
왕은 왕위에 오르자 곧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수곡성을 쳤고, 쳐들어온 말갈과 고구려군도 물리쳤다.
512년 9월, 고구려군이 가불성을 빼앗고
원산성을 깨뜨렸다.
왕은 날랜 기병 3천을 이끌고 위천 북쪽으로 나아갔다.
고구려군은 왕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얕보아, 진을 치지 않았다.
왕은 뜻밖의 꾀를 내어, 급히 들이쳤다.
고구려군은 크게 무너졌다.
521년 11월, 왕은 바다 건너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글을 올렸다.
사신의 배는 서해를 건너, 양나라의 도읍 건강(지금의 중국 난징)으로 향했다.
12월, 양나라 황제(무제)는 무령왕에게 ‘영동대장군’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523년 2월, 예순둘의 왕은 북쪽 한성으로 길을 나섰다.
왕은 한수 북쪽 고을 백성을 불러 쌍현성을 쌓게 하고, 3월에 돌아왔다.
523년 5월, 무령왕이 세상을 떠났다.
『삼국사기』에는 왕이 몇 살이었는지 나오지 않는다.
그 나이는,
땅속에 묻힌 돌판에 새겨졌다.
왕이 무덤에 묻힌 것은, 스물일곱 달 뒤인 525년 8월이었다.
새 왕 성왕(명농)은 연꽃무늬 벽돌로 쌓은 무덤에 아버지를 모셨다.
왕의 관은 바다 건너 왜 땅에서만 자라는 금송으로 짰다.
그리고 무덤의 문이 닫혔다.
4년 뒤(529년) 왕비가 곁에 묻힌 다음,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무덤 위로 풀이 자라고, 나무가 자랐다.
1930년대에 이곳을 조사한 사람들도, 이 언덕을 곁의 6호분 뒤를 받친 뒷산쯤으로 여겼다.
그렇게, 1,400여 년이 흘렀다.
돌판의 첫머리에는, 무덤 주인의 칭호와 이름이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삼국 시대의 왕릉에서 무덤 주인의 이름이 나온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소식이 퍼지자 기자와 구경꾼이 밤새 몰려들었고, 발굴단은 서둘러 유물을 거두었다.
4,600여 점의 유물이, 하룻밤 사이에 모두 무덤 밖으로 나왔다.
서두른 발굴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았다.
무덤 안에서 나온 글로 주인과 묻힌 날까지 밝혀진 삼국 시대 왕릉은, 지금도 이곳 하나뿐이다.
한성을 잃고 흔들리던 나라를
다시 일으킨 왕,
백제 사마왕 — 무령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