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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바다를 건넌 칠지도
제18화

바다를 건넌 칠지도

백제 근초고왕 · 346년 ~ 37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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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마다 바람·모닥불·강물 소리가 바뀌고, 이야기 흐름을 따라 음악도 달라져요.
지난 이야기

고구려 고국원왕은 342년 전연에게 도읍을 짓밟히고 아버지 미천왕의 시신까지 빼앗겼다가 되찾았다. 371년, 그는 평양성에서 백제군을 막다 날아온 화살에 쓰러졌고, 아들 소수림왕은 불교와 태학, 율령으로 나라를 다시 세웠다. 그 평양성을 친 백제의 왕이, 이번 화의 주인공이다.

등장인물

근초고왕백제의 왕.
멀리 내다보는 사람
근구수근초고왕의 아들.
백제의 태자
막고해백제의 장군.
태자 곁을 지킨다
사기고구려로 달아났던
백제 사람
모루도읍의 대장장이.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고국원왕고구려의 왕.
이름은 사유

346년, 비류왕의 둘째 아들이 백제의 왕위에 올랐다. 근초고왕이다.

『삼국사기』는 그를 ‘체격과 생김새가 빼어나고, 멀리 내다보는 식견이 있었다’고 적었다.

근초고왕백제의 왕

모루나는 모루. 백제 도읍에서 쇠를 두드려 먹고산다.

모루대장장이
모루쇠는 두드릴수록
단단해진다.
근구수근초고왕의 아들 · 백제의 태자
태자 근구수가지가 일곱 달린 칼을
만들 수 있겠나?
모루가지가… 일곱이요?
그런 칼로는 싸울 수 없습니다.
싸우려는
칼이 아니다.

369년 9월, 고구려 왕 사유(고국원왕)가 보병과 기병 2만을 이끌고 내려와 치양에 진을 쳤다.

고구려군이다!
달아나라!

고구려군은 군사를 나누어 백성의 집을 덮쳤다.

전령고구려군 2만이
치양을 짓밟습니다!
근초고왕태자는 지름길로
달려가 쳐라!

태자의 군사가 반걸양에 이르러 싸움을 앞두었을 때, 고구려 쪽에서 한 사내가 넘어왔다.

군사고구려 진에서
넘어온 놈입니다!
사기저는… 본래
백제 사람입니다!

사기는 본래 백제 사람이었다.

나라의 말 발굽을 잘못 다치게 하고는, 벌이 두려워 고구려로 달아났었다.

막고해백제의 장군
사기저들은 수가 많아도,
머릿수만 채운 군사입니다.
날랜 것은
붉은 깃발 부대뿐!
그것부터 깨면,
나머진 절로 무너집니다.
태자…붉은 깃발이라.

태자는 곧장 붉은 깃발 부대를 들이쳤다.

붉은 깃발이 꺾이자, 고구려군은 크게 무너졌다.

태자는 달아나는 적을 쫓아, 수곡성 서북쪽까지 이르렀다.

장군 막고해태자, 일찍이 도가의 말을 들으니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했습니다.
이미 얻은 것이 많은데,
어찌 더 구하십니까?

태자는 그 말을 옳게 여겨 멈추었다. 그리고 그곳에 돌을 쌓아 표시를 했다.

태자오늘 이후, 누가 다시
여기까지 올 수 있겠는가!

그 땅의 바위에는 말발굽처럼 패인 틈이 있었다.

그 뒤로 오래도록, 사람들은 그것을 ‘태자의 말 발자국’이라 불렀다.

그해 11월, 왕은 한수 남쪽에서 군사를 크게 사열했다. 깃발은 모두 누런빛이었다.

모루나도 구경꾼 틈에 있었다. 누런 깃발 아래, 내가 두드린 창날이 번쩍였다.

모루그해, 나는 그 칼을 두드렸다. 접고, 두드리고, 또 접었다.

모루백 번 단련한 쇠라야,
가지가 부러지지 않는다.

모루칼날에는 글자를 파고, 그 홈마다 금실을 두드려 박았다.

모루글자마다
금실을 박았습니다.
태자…‘예부터,
이런 칼은 없었다.’

칼날 양쪽으로 가지가 셋씩, 모두 일곱 갈래로 뻗은 칼이었다.

모루온갖 병기를
물리치는 칼…

371년, 고구려가 다시 군사를 일으켰다. 왕은 패하 강가에 군사를 숨겨 두었다가, 적이 이르자 들이쳐 물리쳤다.

그해 겨울, 왕과 태자는 날랜 군사 3만을 이끌고 고구려의 평양성으로 향했다.

근초고왕태자 근구수
고국원왕고구려의 왕 사유
고구려 왕물러서지 마라!
이 성을 지켜라!

고구려 왕 사유는 몸소 나와 힘껏 싸우며 성을 지켰다.

날아온 화살 하나가, 고구려 왕을 맞혔다.

전령고구려 왕이…
숨을 거두었다 합니다.
근초고왕…끝까지 성을 지키다
쓰러졌구나.
군사를 거두어라.
돌아간다.

고구려 왕은 그달 23일 세상을 떠났다. 근초고왕은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그해, 왕은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

이듬해 정월, 백제의 사신이
바다 건너 동진으로 떠났다.

372년 6월, 동진의 황제도 사신을 보내, 왕을 ‘진동장군 영낙랑태수’로 삼았다.

동진의 사신황제께서 백제 왕께
벼슬을 내리셨소.
근초고왕바닷길이 열렸구나.
고구려백제신라가야왜동진마한 땅서해동해치양 369평양성 371372년 동진으로왜로한성건강이소노카미 신궁칠지도가 전하는 곳위치와 뱃길은 대략이에요.점선 테두리는 해석이갈리는 곳이에요.치양 = 황해도 배천 일대(짐작)

백제는 북으로 고구려와 맞서는 한편, 바다 건너 동진과 사신을 주고받았다.

모루그 무렵, 칠지도를 실은 배가 바다로 나아갔다.

모루잘 가거라…
일곱 갈래의 빛아.

칼은 바다를 건너 왜로 갔다.

칼에 새긴 글은 흔히 ‘백제 왕세자가 왜왕을 위해 만들었다’고 읽히고, 만든 해는 369년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그런데 8세기에 엮은 일본의 역사책 『일본서기』는, 백제 사신이 칠지도를 왜에 ‘바쳤다’고 적었다.

내려 준 칼인가, 바친 칼인가, 주고받은 선물인가.
지금도 해석이 갈린다.

옛 기록에 따르면, 백제는 이 무렵 박사 고흥을 얻어 처음으로 나라의 일을 글로 적었다.

고흥백제의 박사
근초고왕우리가 한 일을,
뒷사람들이 알게 하시오.

375년 7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수곡성을 쳐서 빼앗았다.

태자오늘 이후, 누가 다시
여기까지 올 수 있겠는가!
근초고왕크게 군사를 일으켜,
이 일을 갚으리라!

그러나 그해 흉년이 들어, 끝내 군사를 내지 못했다.

근초고왕우리가 한 일을,
뒷사람들이 알게 하시오.

375년 11월, 근초고왕이 세상을 떠났다. 태자 근구수가 뒤를 이었다.

그로부터 1500년쯤 지나,

바다 건너 한 신궁에서
녹슨 칼 한 자루가 빛을 보았다.

1870년대, 일본 나라현의 이소노카미 신궁.

七支刀
태자…‘예부터, 이런 칼은 없었다.’

신궁을 맡은 간 마사토모가 오래된 칼의 녹을 벗겨 내자, 금 글씨가 드러났다.

칼 뒷면 끝의 닳은 글자들을,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읽는다.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백제에서 바다를 건너간 그 칼은, 지금도 이소노카미 신궁에 있다.

제18화 끝

역사 노트

이야기 속 장면은 이런 기록과 유적을 바탕으로 그렸어요.

  1. 치양과 반걸양

    『삼국사기』 근초고왕 조는 369년 9월 고구려 왕 사유가 보병·기병 2만으로 치양에 진을 치고 민가를 약탈하자, 태자가 지름길로 달려가 깨뜨리고 적 5천여 명을 베었다고 적었어요. 사기의 귀띔과 붉은 깃발 부대, 막고해의 말과 돌무더기 이야기는 근구수왕 조에 따로 실렸는데, 여기서는 싸움터를 ‘반걸양’이라 불러요. 두 이야기를 흔히 같은 싸움으로 보지만, 치양과 반걸양이 같은 곳인지는 알 수 없어요. 치양은 지금의 황해도 배천, 수곡성은 황해도 신계 일대로 짐작해요.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근구수왕,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2. 그칠 줄 아는 지혜

    막고해가 말한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는 『노자』(『도덕경』)의 구절이에요. 태자가 돌을 쌓은 곳의 말발굽 같은 바위틈을, 사람들은 ‘태자의 말 발자국’이라 불렀대요. 『삼국사기』는 ‘지금도(至今)’ 그렇게 부른다고 적었는데, 이 ‘지금’이 고려 때인지 『삼국사기』가 옮겨 적은 옛 기록의 때인지는 알 수 없어요. 하지만 6년 뒤인 375년, 고구려는 그 수곡성을 빼앗았어요.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구수왕
  3. 371년 평양성

    백제본기와 고구려본기는 371년 겨울(고구려본기는 10월) 백제 군사 3만이 평양성을 쳤고, 고구려 왕이 날아온 화살에 맞아 숨졌다고 똑같이 전해요. 백제본기는 그가 ‘힘껏 싸워 막았다’고 적었고, 고구려본기는 그달 23일에 세상을 떠났다고 적었어요. 그는 ‘고국의 들’에 묻혀 고국원왕이라 불려요. 근초고왕이 그의 죽음을 듣고 하는 말은 기록에 없는, 지어낸 대사예요.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4. 칠지도 복제품칠지도 복제품 · 한성백제박물관

    칠지도와 그 글

    칠지도는 일본 나라현 이소노카미 신궁에 전하는 쇠칼로, 길이가 약 75cm이고 칼날 양쪽으로 가지가 셋씩 뻗어 있어요. 1870년대 신궁을 맡은 간 마사토모가 녹을 벗겨 내다 앞뒤에 금으로 박은 글자 61자를 찾아냈는데, 닳아서 읽기 어려운 글자가 있어 판독이 학자마다 달라요. 만든 해 ‘태□ 4년’은 동진의 태화 4년(369)으로 보는 견해가 많지만, 408년이나 480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어요. 칼을 두드린 대장장이 모루와 제자, 태자 근구수(명문의 ‘왕세자’로 보는 견해가 많아요)가 대장간을 찾는 장면은 기록에 없는, 상상으로 그린 거예요.

    칠지도 명문 (이소노카미 신궁 소장)
  5. 이소노카미 신궁이소노카미 신궁 · 일본 나라현 덴리

    누가 누구에게 준 칼일까

    『일본서기』 신공기 52년 조는 백제 사신이 칠지도와 칠자경을 왜에 ‘바쳤다’고 적었어요(이 책의 연대를 120년 늦추어 372년의 일로 보는 견해가 많아요). 그러나 칼의 글은 흔히 ‘백제 왕세자가 왜왕을 위해 만들었다’고 읽혀서, 바친 칼(헌상설), 백제 왕이 내려 준 칼(하사설), 대등한 사이의 선물, 동진이 백제를 거쳐 내린 칼 등으로 해석이 갈려요. 『일본서기』는 한반도와의 일을 왜를 중심으로 꾸며 적은 대목이 많아서, 학자들은 다른 기록과 견주며 따져 읽어요. 같은 책 신공기 49년 조의 남쪽 정벌 이야기를 근초고왕이 남쪽 마한 땅을 아우른 일로 고쳐 읽는 견해가 많지만, 어디까지 아울렀는지는 의견이 갈려요.

    『일본서기』 신공기 · 칠지도 명문
  6. 동진의 벼슬과 고흥의 『서기』

    『삼국사기』는 372년 정월 백제가 바다 건너 진(동진)에 사신을 보냈다고 적었고, 『진서』는 그해 6월 동진이 백제 왕 ‘여구(餘句)’를 진동장군 영낙랑태수로 삼았다고 전해요. 낙랑군은 이미 313년에 없어졌으니, 실제로 다스리는 땅이 아니라 이름만 붙은 벼슬로 봐요. 또 『삼국사기』는 옛 기록을 빌려 이 무렵 박사 고흥을 얻어 비로소 『서기』가 생겼다고 전하는데, 김부식은 고흥이 다른 책에 보이지 않아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고 덧붙였어요.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 『진서』 간문제기
  7. 서울 석촌동 고분군 3호분서울 석촌동 고분군 3호분

    한산과 한성의 유적

    『삼국사기』는 371년 근초고왕이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고 적었는데, 한산이 어디인지, 정말 도읍을 옮겼는지는 의견이 갈려요. 이 무렵 백제 도읍의 중심은 한강 남쪽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일대였다고 보는 견해가 많아요. 서울 석촌동의 큰 돌무지무덤(3호분)을 근초고왕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아요.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2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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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 열여덟 살의 왕

고국원왕이 평양성에서 쓰러진 지 스무 해. 열여덟 살의 손자 담덕이 고구려의 왕이 되어 흰 말에 오른다.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에 바닷물이 휘감아 도는 성, 관미성을 향하여.

사진 출처

이 웹툰의 삽화는 모두 새로 그린 것이며, 등장인물의 이름과 대사는 역사적 사실과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상상해 재구성한 것입니다. 연대와 해석은 학계의 일반적인 설명을 따랐고, 의견이 갈리는 부분은 역사 노트에 밝혀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