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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자명고가 찢어지던 밤
제14화

자명고가 찢어지던 밤

고구려 대무신왕 · 서기 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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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리와 함께 보면 더 생생해요.
장면마다 바람·모닥불·강물 소리가 바뀌고, 이야기 흐름을 따라 음악도 달라져요.
지난 이야기

한반도 남쪽 삼한에는 작은 나라 일흔여덟이 어깨를 맞대고 살았다. 나라마다 신지·읍차가 사람들을 이끌고 천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쫓기던 사람도 잡아갈 수 없는 신성한 땅 소도가 있었다. 이번 이야기는 그보다 앞선 1세기의 북쪽, 주몽이 세우고 유리가 이은 고구려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등장인물

호동대무신왕의 아들.
얼굴이 아름다운 왕자
낙랑 공주낙랑 왕 최리의 딸.
기록에는 이름이 없다
최리낙랑의 왕
대무신왕고구려의 세 번째 왕.
호동의 아버지
원비대무신왕의
첫째 왕비

유리왕의 셋째 아들 무휼이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고구려의 세 번째 임금,
대무신왕.

서기 22년 2월, 대무신왕은 부여로 쳐들어가 대소왕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왕을 잃은 부여군이 고구려군을 겹겹이 에워쌌다.

대무신왕고구려의 왕
대무신왕하늘이시여…
길을 열어 주소서!

군량은 떨어지고, 군사들은 굶주렸다.

그러자 짙은 안개가 일어, 이레 동안 걷히지 않았다고 한다.

대무신왕풀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창을 들려 세워라.

허수아비들이 진영을 지키는 척하는 사이, 고구려군은 밤을 틈타 샛길로 빠져나왔다.

대무신왕과인이 덕이 없어,
가볍게 부여를 쳤소.
나라는 무너뜨리지 못하고
군사와 물자만 잃었으니…
이는 과인의
허물이오.

왕은 몸소 죽은 이를 조문하고 다친 이를 돌보았다. 사람들은 이 왕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겠다고 했다.

그 뒤 대무신왕은 개마국을 쳐서 고구려의 고을로 삼았고,

쳐들어온 한나라 요동군도 꾀를 써서 물러가게 했다.

그리고 서기 32년.

왕에게는 둘째 왕비가 낳은 왕자 호동이 있었다.

호동대무신왕의 아들
대무신왕명중이로구나!
원비왕의 첫째 왕비

얼굴이 아름다워 왕이 무척 아꼈으므로, 이름을 ‘호동(好童)’이라 했다.

서기 32년 4월, 호동은 동쪽 바닷가 옥저 땅을 돌아보고 있었다.

최리낙랑의 왕

마침 그곳을 지나던 낙랑의 왕 최리가, 젊은 호동을 눈여겨보았다.

최리그대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오.
혹시 북국 신왕의
아들이 아니오?
호동그렇습니다.
고구려의 왕자 호동입니다.

‘북국 신왕’, 곧 북쪽 나라 고구려의 대무신왕을 일컫는 말이었다.

최리는 호동을 데리고 낙랑으로 돌아가, 딸을 아내로 주었다.

최리오늘부터 낙랑과 고구려는
한 집안이오!
최리의 딸뒷날 ‘낙랑 공주’라 불린다

낙랑의 무기고에는, 적이 쳐들어오면 저절로 울린다는 북과 뿔피리가 있었다.

최리적이 쳐들어오면, 이 북과
뿔피리가 저절로 운다네.
그러니 아무도
낙랑을 넘보지 못하지.

얼마 뒤, 호동은 홀로 고구려로 돌아갔다.

최리의 딸고구려로 데려가 주신다는
약속, 잊지 마세요.
호동때가 오면,
예를 갖추어 맞이하리다.

고구려로 돌아온 호동은, 낙랑의 북을 잊지 않았다.

최리적이 쳐들어오면,
이 북이 저절로 운다네.
호동그 북만 없다면…

호동은 몰래 사람을 낙랑으로 보냈다.

호동이 글을 최리의 딸에게만
은밀히 전하라.

호동의 말이, 최리의 딸에게 은밀히 전해졌다.

호동의 말그대가 무기고에 들어가
북을 찢고 뿔피리를 부순다면,
내가 예를 갖추어
맞이하겠소.
그렇지 않으면…
맞이하지 않겠소.
최리그러니 아무도
낙랑을 넘보지 못하지.
최리의 딸아버지의 북을…
내 손으로?

어느 날 밤, 최리의 딸은 날카로운 칼을 품고 몰래 무기고로 들어갔다.

칼끝이 북의 가죽을 갈랐다.

이어서 뿔피리의 주둥이를 베어 냈다.

호동내가 예를 갖추어
맞이하겠소.

최리의 딸은 이 일을 몰래 호동에게 알렸다.

소식을 들은 호동은, 왕에게 낙랑을 치자고 권했다.

호동아버님,
지금 낙랑을 치소서!
대무신왕군사를 내어라!

고구려 군사들이 소리 없이 낙랑으로 내달렸다.

북도 뿔피리도 울리지 않았다. 최리는 아무 대비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낙랑 파수꾼고구려군이다!
벌써 성 밑까지 왔다!
최리북이…
찢어져 있다니!
뿔피리까지…!

그제야 최리는, 북과 뿔피리가 모두 부서진 것을 알았다.

최리는 딸을 죽이고,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했다.

호동공주는…?
공주는 어디 있소!
최리의 딸고구려로 데려가 주신다는 약속,
잊지 마세요.

『삼국사기』는 이런 이야기도 함께 전한다.

왕이 처음부터 낙랑을 없애려고 혼인을 청해 최리의 딸을 며느리로 맞았고, 그 뒤 낙랑으로 돌려보내 무기를 부수게 했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낙랑의 북은
다시 울리지 않았다.

원비는 호동이 제 아들을 제치고 태자가 될까 두려웠다.

해우원비의 아들
원비이러다간…
호동이 태자가 되겠구나.
원비호동이 저를
예로 대하지 않사옵니다.
아무래도 딴마음을
품은 듯하옵니다.
대무신왕남이 낳은 아이라 하여
미워하는 것이오?
원비대왕께서
몰래 살펴보소서.
그런 일이 없으면,
제가 벌을 받겠나이다.

왕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호동에게 죄를 주려 했다.

늙은 시종왕자님, 어찌 스스로
밝히지 않으십니까?
호동내가 해명하면,
어머니의 잘못이
드러나오.
호동아버님께는
근심을 끼치게 되고…
그것을 어찌
효라 하겠소.

호동은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2월, 왕은 원비의 아들 해우를 태자로 세웠다.

훗날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이렇게 적었다.

왕은 헐뜯는 말을 믿고
죄 없는 아들을 죽게 했으니,
어질지 못했다.

그러나 호동에게도 잘못이 있다. 아버지가 작은 매를 들면 맞고 큰 매를 들면 피해, 아버지가 옳지 못한 일을 저지르지 않게 했어야 했다.

대무신왕이는 과인의 허물이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서기 37년, 대무신왕은 다시 낙랑을 쳐서 없앴다.

서기 44년 가을에는 한나라 군사가 바다를 건너와 낙랑을 쳤고, 살수 남쪽이 한나라에 속했다고 한다.

그해 겨울, 대무신왕도 세상을 떠났다.

찢어진 북 하나의 이야기는
‘자명고’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전해 온다.

제14화 끝

역사 노트

이야기 속 장면은 이런 기록과 유적을 바탕으로 그렸어요.

  1. 『삼국사기』 옛 판본『삼국사기』 옛 판본 (국보)

    『삼국사기』가 전하는 호동과 낙랑

    이 이야기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5년(서기 32년) 조에 실려 있어요. 4월에 호동이 옥저에서 낙랑 왕 최리를 만나 그 딸과 혼인했고, 최씨의 딸이 무기고의 북과 뿔피리를 부수자 고구려가 낙랑을 덮쳐 최리가 딸을 죽이고 항복했대요. 같은 대목에 ‘혹은 이르기를’ 하며, 왕이 처음부터 낙랑을 없애려고 혼인을 청했다는 다른 이야기도 함께 적었어요. 11월에 호동이 목숨을 끊었고, 12월에 해우가 태자가 되었다고 해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5년
  2. 평양 석암리 9호분 금제 띠고리평양 석암리 9호분 금제 띠고리 · 국립중앙박물관

    최리의 ‘낙랑’은 어디였을까

    기원전 108년 한나라는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낙랑군을 두었는데, 많은 학자들은 그 중심을 지금의 평양 일대로 봐요. 『삼국사기』가 최리를 ‘낙랑왕’이라 불렀기 때문에, 그가 다스린 ‘낙랑’이 낙랑군인지, 따로 있던 나라 ‘낙랑국’인지 의견이 갈려요. 낙랑국으로 보는 학자들도 평양 일대에 있었다는 견해와, 호동이 최리를 만난 옥저에 가까운 동해안 쪽 세력이었다는 견해로 나뉘어요. 37년에 고구려가 낙랑을 없앴고 44년에 한나라가 바다를 건너와 낙랑을 쳤다는 기록도, 그래서 여러 가지로 풀이해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 『한서』 지리지
  3. 스스로 우는 북, 자명고

    『삼국사기』는 이 북과 뿔피리를 ‘고각(鼓角)’이라고만 적고, 적군이 오면 저절로 울렸다고 했어요. ‘스스로 우는 북’이라는 뜻의 ‘자명고(自鳴鼓)’는 『삼국사기』에는 나오지 않는 이름이에요. 1930년대부터 이 이야기가 소설·연극·오페라·드라마로 거듭 만들어졌고, 유치진의 희곡 「자명고」처럼 이 이름을 제목으로 쓴 작품들이 나오면서 널리 쓰이게 되었어요. 북과 뿔피리는 군대에서 군사를 모으고 신호를 보내던 물건이라, 이 이야기를 낙랑의 경계 태세나 나라의 위엄을 무너뜨린 일에 빗대어 풀이하기도 해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5년
  4. 호동의 죽음과 김부식의 평

    『삼국사기』는 원비가 호동을 헐뜯은 말과, 해명하라는 권유에 호동이 ‘해명하면 어머니의 잘못을 드러내 왕께 근심을 끼치니 효라 할 수 없다’고 답한 일을 적었어요. 이 책을 엮은 김부식은 왕이 헐뜯는 말을 믿고 죄 없는 아들을 잃었으니 어질지 못했다고 꾸짖었어요. 그러면서 호동도 아버지의 큰 매는 피해서 아버지를 옳지 못한 일에 빠뜨리지 말았어야 했다며, 작은 도리에 매여 큰 뜻을 놓쳤다고 평했어요. 이 화에서 원비의 말은 기록보다 짧게 줄였어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5년 · 김부식의 논평
  5. 싸워서 넓힌 나라, 대무신왕

    대무신왕은 유리왕의 셋째 아들로, 서기 18년에 왕이 되었어요. 22년에 부여를 쳐서 대소왕을 죽였지만 부여를 무너뜨리지는 못했고, 짙은 안개 속에 풀 허수아비를 세워 두고 겨우 빠져나왔다고 해요. 26년에는 개마국을 쳐서 고을로 삼았고 이웃 구다국도 항복해 왔어요. 28년 한나라 요동태수가 쳐들어오자 왕은 위나암성에서 버텼는데, 좌보 을두지의 꾀로 성안 연못의 잉어를 수초에 싸서 보내 ‘성안에 물이 넉넉하다’고 믿게 하자 적이 물러갔대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6. 국내성 성벽 모서리국내성 성벽 모서리 · 중국 지린성 지안

    국내성과 위나암성

    『삼국사기』에 따르면 유리왕이 서기 3년에 도읍을 국내성으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어요. 국내성은 지금의 중국 지린성 지안으로 보는데, 언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는지는 학자마다 의견이 달라요. 위나암성은 지안 북쪽의 산성자산성으로 보는 견해가 많은데, 성안에 돌로 쌓은 연못이 있어요. 국내성과 산성, 둘레의 고구려 무덤들은 200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었어요. 사진 속 돌 성벽은 훗날 다시 쌓은 것으로 봐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7. 이 화에서 상상으로 그린 것

    기록에는 ‘최씨의 딸’로만 나와서 공주의 이름은 알 수 없고, ‘낙랑 공주’는 뒤에 붙은 이름이에요. 최리가 북을 자랑하는 장면, 두 사람이 나눈 말, 호동이 낙랑 공격에 함께하고 비녀를 간직하는 장면, 왕이 눈 속에 홀로 선 장면은 이야기를 위해 상상으로 그렸어요. 북을 찢은 때가 밤이었다는 것도 기록에는 없어요. 『삼국사기』에는 호동에게 해명을 권한 사람이 그저 ‘어떤 이’라고만 나와서, 이 화에서는 늙은 시종으로 그렸어요.

이번 화의 열쇠말

다음 화

제15화 · 봄에 빌려주고 가을에 거두다

서기 194년, 서리가 내려 곡식이 다 죽었다. 사냥을 나섰던 고국천왕은 길가에서 우는 젊은이를 만나고, 나라의 곡식을 봄에 빌려주고 가을걷이 뒤에 거두는 법을 만든다.

사진 출처

이 웹툰의 삽화는 모두 새로 그린 것이며, 등장인물의 이름과 대사는 역사적 사실과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상상해 재구성한 것입니다. 연대와 해석은 학계의 일반적인 설명을 따랐고, 의견이 갈리는 부분은 역사 노트에 밝혀 두었습니다.